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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 천조국의 방산, 신기술 '속도경쟁'에도 안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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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위산업은 전투기ㆍ전차ㆍ자주포 쪽에서 수출 대박을 터뜨리며 전성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높은 가성비, 양산 능력, 검증된 안정성이 국산 무기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정작 기술력을 갖춘 국내 IT기업이 국내 방산에 진출해 국군에 신무기를 납품하는 데에는,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신기술이 신무기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한국일보가 점검해 봤습니다.
"군(軍)이 무기체계에 신기술을 도입할 때 특징이 있어요. 군 스스로도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업체를 시켜 물건부터 만들게 하는 거죠."
국내 방위산업체에서 20년 이상 일한 관계자는 군의 신속시범획득사업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신속시범획득사업이란 무기로 쓰일 만한 민간 신기술을 군에서 시범 운용해 군사적 활용성을 확인해 보는 사업이다. 민간 기술을 빠르게 군의 전력체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제도다.
그런데 한국 신속시범획득사업의 특징은 군이 스스로 필요에 의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걸 무기로 만들면 어떨까요?"라는 민간의 제안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군이 시범 적용해 본 다음에야,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뒤늦게 전력화 결정이 이뤄지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과 다르다. 첫 단계부터 군의 수요에 따라 시제품이 생산된다. 2010년대 중반 민간 기업의 첨단기술을 무기 양산화까지 빠르게 이어가는 시스템을 완비했기 때문이다. 국방 예산을 1년에 1,000조 원이나 쓴다고 해서 '천조국'으로 불리는 거대한 미군이 속도까지 갖추려고 안간힘을 쓰는 셈이다.
미국이 무기 신기술 도입에서 속도를 제일의 가치로 내세운 것은 2014년부터다. 척 헤이글 당시 국방장관은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 3차 상쇄전략(Offset Strategy)을 공표했다. △대소련 핵 억지력 확보를 위한 1950년대 1차 상쇄전략 △1970년대 정밀유도 및 우주 기술 우위를 확보하려는 2차 상쇄전략에 이은 미군의 큰 기조변화였다. 중·러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무인 작전체계와 인공지능(AI) 기술 등 핵심 군사역량을 확보하는 게 3차 상쇄전략의 뼈대다.
정보통신기술(ICT)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전의 특성상 미국은 새 전략의 성패가 거대 방산기업이 아닌 민간 IT기업에 달려 있다고 봐, 실리콘밸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미 국방부는 2015년 실리콘밸리에 국방혁신센터(DIU)를 설립하고 인근 IT 기업을 유치해 통상 1, 2년 내(최장 5년) 전력화가 가능한 무기체계 양산을 추진 중이다. 시제품 개발부터 군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후속 양산까지 보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속도를 강조한 이런 육성책 덕분에 방산업계에 뛰어들어 기업가치를 단시간 안에 키운 '방산 유니콘'이 잇달아 등장했다. 현지에선 이들 업체 이름의 첫 글자를 모아 샤프(SHARPE)라고 부른다. 실드AI(Shield AI), 호크아이360(Hawkeye360), 안두릴(Anduril), 리벨리온 디펜스(Rebellion Defense), 팔란티어(Palantir), 에피러스(Epirus) 등 6개 기업이다.
이들 기업이 유니콘 등극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4.5년. 특히 안티드론(드론 무력화) 장비 기업인 안두릴은 기업가치 5억 달러 돌파까지 불과 2년 6개월이 걸렸다. 이달 기준 기업가치는 70억 달러 이상이다. 에피러스는 전자기펄스(EMP)로 군집드론 공격을 무력화하는 장비를 개발해 지난달 미군에 공급했다. 인공지능 전문 스타트업 실드AI는 F-16, F-35 전투기 등에 AI조종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도 신무기 전력화에 통상 10~15년이 걸린다는 지적에 따라 2020년부터 신속시범획득사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사업이 ‘신속’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방위사업청 업무지침에는 군이 수요(시범 대상사업 등)를 먼저 결정해 민간의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하는 규정이 없었다. 시범사업 종료 후 후속 양산을 보장하지도 않았고, 군의 정식 전력화 결정 시한도 규율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간 업체 입장에선 어렵게 경쟁입찰을 거쳐 시제품 납품에 성공해도 정식 전력화 결정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 3년간 33개 업체가 시범사업자로 선정됐으나 이달까지 후속 양산계약을 맺은 업체는 없다.
방사청은 지난달 업무지침을 바꿔 군이 시범사업 초기부터 수요 결정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조항을 신설하고 민간의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시범사업자의 후속 양산을 보장하지 못하는 점은 여전하다. 장원준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업 초기부터 군의 소요(양산 계획)와 연계돼야 신속시범획득사업의 근본 목적인 신속한 실전배치가 가능하다"며 "향후 북한 무인기 등 비대칭 위협에 대응하려면 미국의 DIU와 같은 조직을 구성할 근거(한국형 신속획득법)를 빨리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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