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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슬램덩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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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취직 후 나에게 한 첫 선물은 슬램덩크 만화책 전집이었다. 일본 만화책은 '불량학생'이 읽는 거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읽던 설움을 씻겠다며 저지른 일이었다. 학창시절 최애 만화를 소장하는 것.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로 고교농구를 그린 그 만화에 빠졌었다. 주인공 강백호가 웃겨서. '포기를 모르는' 3점슈터 정대만이 멋있어서. 북산 농구부가 진정한 팀이 되는 과정이 뭉클해서. 작화가 농구 경기의 생동감을 잘 그려내서.
하지만 딱, 결말만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북산은 전국 고교농구 최고의 팀을 어렵게 꺾고 3회전에 올라갔지만, 다음 경기에서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했다". 단 2쪽 분량으로 북산의 '전국 제패' 목표를 향한 여정이 마무리된다. 허무한 결론에 당황스러워했던 그때 기억이 또렷하다. '이게 끝이라고?'
그런데 전집을 다시 읽었을 땐 그 결말이 새롭게 보였다. 실패 후 각자의 일상이 계속되는 마지막 몇 장이 오히려 이 만화를 고전으로 만든다는 생각에 미쳤다. 2년의 백수 시절 경험 덕분에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란 걸 알아채서일까. 실패 자체보다는 그 후가 중요하다는 걸 어렴풋이 이해할 나이가 되어서일까.
최근 극장가에 흥행 열풍을 일으킨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 기억을 깨웠다. 원작에 없던 북산의 상대팀(산왕) 소속 에이스 선수 정우성의 서사가 결정적이었다. 경기 전 한 사원에서 "나에게 필요한 경험을 주세요"라고 기도한 그는 북산과의 경기에서 패배한다. 최정상의 선수에게 필요한 건 패배의 경험이었던 셈이다. '3040 향수를 자극했다.' '2D와 3D의 조화가 절묘했다.' 여러 흥행 요인이 있겠지만, 만화책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슬램덩크가 빛나는 건 실패의 가치를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패한다. 몇 번을 넘어져야 설 수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실패 자체보다 실패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문제를 인정하고 파고드는 노력이 더해졌을 때 과거의 실패는 비관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그때 비로소 실패의 가치가 증명된다.
개인은 물론 사회도 그렇다. 실패를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힘쓰고 있나를 돌아보면 고개를 떨구게 된다.
달력을 보니 대구지하철 참사가 어느덧 20주기(2월 18일)를 맞았다. 재난·안전 대응 실패로 192명이 숨진 인재(人災)에 그토록 분노했는데, 우리는 또 소중한 159명을 잃었다. 똑같은 실패를 반복했다. 아니 어쩌면 더 후퇴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정부의 대응 실패로 인정조차 안 하는 발언이 마구잡이로 쏟아지고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않고 있다. 결국 재난·안전 책임 부처인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이 어느 쪽이든, 헌정 사상 첫 국무위원 탄핵소추안 가결이란 사태까지 온 지금의 현실이 뼈아프다.
이대로라면 이태원 참사 20주기를 맞는 그날에도 우리는 또 분노만 하고 있을 것이다. 실패를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으로 바꿔내야 그나마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만화보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만화 같은 세상을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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