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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를 세계 도시로 키운 건 '유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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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중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중심지, 바로 상하이다. 이 도시의 위상이 원래부터 높았던 건 아니다. 1842년 난징조약 체결 이전까지 상하이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런 상하이를 세계적 대도시로 키워낸 일등공신은 누구일까.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타도했다는 중국 초대 주석 마오쩌둥의 프로파간다적 서사를 비롯한 여러 분석을 떠올릴 수 있지만, 미국 저널리스트 조너선 카우프만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거대한 부를 이룬 유대인 라이벌 가문에 주목한다.
카우프만은 '보스턴 글로브'의 신참 해외 특파원이던 1979년 처음 상하이 땅을 밟았다.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1989년과 이후 2002년에도 상하이를 방문하며 도시와의 인연을 이어간다. 중국 담당 기자로 30년 가까이 일하며 퓰리처상을 받기도 한 저자는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의 그늘이 수십 년간 드리운 도시에서 유럽식 향락의 유물을 거듭 발견한다. 곳곳에서 프랑스어가 들리는 호화로운 호텔에 우연히 발을 들이거나, 현지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영국 자본가가 소유했던 대저택의 존재를 알게 되는 식이다.
이에 저자는 치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로 중국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거대한 기업 제국을 형성한 두 유대인 가문 서순과 커두리의 유산을 밝혀낸다. 그는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 두 일가가 상하이를 지배한 과정을 상세히 풀어낸다. 중국이 그간 '치욕의 100년'으로 여기며 감추려 했던 이면의 역사다. 아편전쟁의 뒤에는 이라크 바그다드의 권력 투쟁을 피해 상하이로 옮겨온 유대인 데이비드 서순이 아편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역사가 있다. 청나라의 몰락을 불러온 '고무 회사 주가 버블 사태' 이면에는 파산한 고무 회사들을 구제하며 백만장자가 된 유대인 금융업자 엘리 커두리가 있다.
책은 두 가문의 성공 신화를 읊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서순가와 커두리가는 뛰어난 사업가였지만 종종 형편없는 정치가였다"며 이들이 중국 사회에 끼친 부정적 영향도 지적한다. 서순가의 토대였던 아편 무역은 수백만 명을 아편 중독으로 내몰며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제국주의의 수혜로 축적한 홍콩 내 자본을 지키려 홍콩의 민주주의 도입에 반대한 커두리가는 아직도 주권 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홍콩에 큰 빚을 졌다.
200여 년 전 상하이를 들여다보는 일이 요즘 시대에는 무용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가문이 상하이를 일군 일대기에는 타국과의 군사적 긴장 상태, 국가 개혁에의 방향성 충돌, 민족주의 등 지금의 중국이 당면한 문제와 닮은 지점이 적지 않다.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말처럼, 두 가문의 착오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상하이 역사의 효용성은 현재로도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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