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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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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 전까지 결핍과 시련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믿음을 굳건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인생에서 나를 성장시킨 근원은 어린 시절의 결핍이라 믿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 때에도 시련과 고난의 시기를 통과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많이 다뤘다. 그 시기가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30대가 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갑각류가 수십 번의 탈피를 거치며 몸집을 키우고 단단해지듯 그 과정이 불필요한 것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겠다. 다만 인간과 갑각류, 파충류의 탈각, 탈피의 차이는 인간은 그 과정을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나올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본인이 해내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혼자서는 결핍은 결핍으로 시련은 그저 시련으로 남을 뿐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곁에 있는 성숙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그 만남이 우연이었든 필연이었든 간에 말이다. 때때로 우연처럼 마주친 호의나 문장 하나가 살아갈 힘을 주기도 했고, 때로는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결핍을 어떻게 메꿔야 하는지, 그들에게도 저마다의 결핍과 고난이 있었음을 배웠으며, 그것을 서로 공유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만든 영화나 문학 작품들이 없었다면.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결핍이나 시련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당연히 좋은 것만도 아니고 말이다. 좋은 점이라고 한다면 대상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과 자생력이 생긴다는 것이고, 나쁜 점이라면 당연히 모든 시련과 결핍은 겪고 싶지 않다는 데 있다. 그리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 어떤 예고도 없이 외부에서 들이닥친다. 언제 끝날지, 극복할 수 있을지조차 암담하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다 겪는 일이야'라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겪고 난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특권이고, 그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일말의 위로나 위안을 동력 삼아 이 어두움에는 출구가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련은 너무 거대하고 확실한 사건이고, 다정함이란 물처럼 형체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라 그것이 씻겨 나가고 있음은 눈치채기 쉽지 않다. 그러다 나는 이번 생일에 처음으로 이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태어나서 삶이 이토록 불안정한 것은 유의미한 어떤 목표를 향해가기 위한 바다 위에 떠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했었는데, 처음으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함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채워왔던 모든 자양분을 만들어 낸 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나는 그간 시련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든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 보니 나는 그 곁에 있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는 시련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이겨낼 목표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달려가는 이 이야기에는 'Side Kick'(조수, 들러리)도 필요하다. 그들은 주인공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따뜻하게 등을 떠밀어 준다. 내 인생에서 역경을 헤쳐 나가는 것은 나의 몫이겠지만, 다른 사람의 삶에서는 기꺼이 이야기의 여정까지 함께하는 'Side Kick'이 되어주고 싶다. 시련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다정함은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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