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28>한반도 토기 기원을 말하는 제주 고산리 유적
제주는 젊은 화산 지질과 아름다운 자연으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가 출토됐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바로 제주도의 서남쪽 한경면 고산리(高山里)가 그 유적이다. 여행으로 찾은 제주에서 한국 역사의 서막을 생각하게 하는 장소다. 구석기시대가 갓 끝나고 1만 년 전경 신석기시대가 막 시작될 즈음 살았던 제주도 사람들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1987년 정교한 석창(石槍)이 발견된 이래,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통해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사람과 문화의 기원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내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선사고고학자들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가 발견된 동아시아 지역임에도 유독 한반도 토기의 시기가 늦은 이유를 대단히 궁금해했는데 고산리유적에 바로 그 답이 있다.
일출의 성산봉, 그리고 낙조의 당산봉
제주도 여행자라면 성산 일출봉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떠오른 해가 떨어지는 곳, 당산봉 낙조의 황혼 풍경은 또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더불어 그 황혼이 자연 조명이 되어 비치는 당산봉 아래 화산쇄설물이 만드는 화려한 땅의 문양을 보지 않았다면 제주도의 속살을 못 본 셈이다. 당산봉 이름이 ‘닥오름, 닭벼슬산’에서 왔다는 설화를 봐도 오래 전부터 최고의 멋진 경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유네스코 지질공원의 가치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해안로를 걸으며 볼 수 있는 병풍처럼 길게 펼쳐진 화산쇄설물이 이루는 장관은 화산과 바다의 만남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작품이다. 화산이 물속에서 폭발하면서 쇄설물들이 주변으로 흘러내려 수평퇴적층을 만들고, 그 후 오랜 세월 파도가 이 부드러운 층들을 깎아서 오늘날 지형이 생겨난 것이니 ‘자연이 최고의 조각가’임을 웅변하는 곳이다. 당산봉 역시 그 쇄설물의 일부가 남아서 이룬 봉우리고, 정작 화산봉우리는 침식돼 사라졌지만 분화구의 뿌리는 그 앞바다 속에 있을 것이다. 바로 이 화산쇄설물, 화산재, 화산암자갈로 구성된 지질층 위에 신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풀짚을 넣어 만든 토기, 고산리식 토기
진흙에 억새풀 같은 풀짚을 넣어 반죽해 만든 것이 고산리식 토기다. 한반도에서는 오로지 이곳에서만 발견된다. 그런데 이 같은 토기제작 기술을 일본이나 만주 아무르강 유역의 이른 시기 토기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풀짚토기가 연해주로부터 구석기시대 말엽의 정교한 세석인(좁고 긴 작은 석편) 제작 기술과 함께 동해안을 따라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동해안과 남해안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융기문토기가 빗살무늬토기 이전 시기에 나오는데, 고산리에서는 풀짚토기 다음 시기에 융기문토기가 나오니, 한반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오래된 신석기 유적임이 자명하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원초적인 토기의 모습에 무언지 신비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왜 풀짚을 넣었을까? 적어도 700~800도 온도로 굽게 되니 토기에는 풀짚 자국만 남아 있다. 아마도 토기를 만드는 바탕흙의 성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토기성형과정에서 축축한 흙이 주저앉지 않고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거나, 불에 굽는 과정에서 흙성분이 과도하게 팽창하기 때문에 깨어짐을 방지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발굴자인 고재원 제주문화유산연구원장이 붙인 ‘섬유질(質) 토기’라는 명칭에도 그런 기능이 암시된 셈이다. 여하간 인류사적으로 토기 발명 초기에 사용된 원시적이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성형기술임은 틀림없다.
많은 작은 화살촉들, 무엇을 잡았을까?
고산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중 풀짚토기와 함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눌러떼기로 만든 크기 3㎝ 미만의 정교한 돌화살촉들이다. 작은 돌을 손 안에 넣고 뾰죽한 뼈로 눌러 압력을 가해 생선비늘 같은 박편을 계속 떼내 만든 것이다. 700점이 넘게 발견됐다. 하부를 안쪽 또는 바깥쪽으로 둥글게 만들었는데, 활대에 끼는 꼬다리가 있는 것도 있다. 그 작은 도구를 장착하는 부위를 다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립제주박물관 선사실에 전시된 수많은 돌화살촉들의 미세하게 다양한 모습에 생기는 감탄이자 의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잡으려 그 많은 돌화살촉을 이곳에서 만들었을까? 물론 물고기를 잡는 작살의 끝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수가 대단히 많다는 점에서 육지의 동물이나 새 사냥에 더 많이 사용되었음직하다. 훨씬 늦은 시기 유적인 곽지 패총을 봐도 사슴 등 육지동물 사냥이 압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산리유적에 돌화살촉이 많이 남은 이유는 이 마을이 제작터였을 것이고 사냥이 시작되는 곳이었을 것이다.
고산리 신석기시대 마을 풍경
당산봉과 수월봉 사이를 흐르는 자구내 양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동쪽으론 한라산이 보이고 서쪽에는 해발 69m의 당산봉이 있다. 17세기 편찬된 탐라지에 따르면 과거에 빽빽한 숲으로 덮여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평야 남쪽 지평선에는 제주도 남쪽 해안의 산방산이 아련하게 들어오는 평평한 벌판이다. 이곳의 남쪽에 2차대전 당시 일본군 비행장이 남아 있는데, 고산리도 그 후보지 중 하나였을 정도로 가히 제주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다. 수월봉에 어린 ‘녹고의 눈물이 샘물’ 전설에서 보듯 민물수자원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흙으로 덮여 생산성이 높은 널찍한 들판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모여 살 만한 환경이다. 과거에는 제주에서 유일하게 벼가 재배되는 곳이기도 했다.
유적이 있는 곳을 ‘한장밭 또는 뜬밭’이라고 부른다. 현재까지 원형의 작은 집자리가 26기나 발굴됐고 300여 개의 작은 구덩이와 불자리가 발견됐다. 그 중에는 집자리 사이에 길이 2m에 달하는 야외 불자리 구덩이들도 드러나고 있어 신석기시대의 마을 생활을 상상하게 한다. 해가 당산봉을 넘어가면 사냥과 어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불자리에 모여 수평선 위에 붉게 깔린 석양을 배경으로 음식을 조리해 먹고, 석기와 토기 등의 도구를 만들면서 그날 일들을 떠들었을 것이다.
원제주인(原濟州人), 고산리 사람들은 어디서 왔을까?
이 의문에는 풀짚토기에 해답이 있다. ‘어떻게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제작기술이 이곳에 남게 되었을까?’ 고산리 마을이 있던 1만 년전 경에도 남해 바다는 이미 형성돼 있었다. 즉 제주도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이미 외부와의 교류가 극히 제한된 고립된 주민이었을 것이다. 일본 후기 구석기 시대에 혼슈섬에서 50㎞ 떨어진 고쥬시마섬에 배를 타고 가 돌(흑요석·黑曜石)을 채취한 경우도 있지만 먼거리 항해가 그리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결국 자생한 것이 아니라면, 신석기시대에 전래된 기술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중국 양쯔강 유역이나 일본에는 2만 년 전에서 1만5,000년 전의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보다는 늦지만 연해주에서도 고산리보다 오래된 같은 종류의 토기가 발견된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오래된 초기 토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고산리의 토기문화는 '한반도와 주변 황해 일대의 초기 토기문화를 빙산의 일각처럼 보여주는 유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나 일본 열도에서만 토기가 이른 시기에 나타났을 리는 없을 것이다. 1만8,000년 전에는 육지였던 황해나 남해 바다 속에서 아마도 더 오래된 토기문화가 앞으로 발견될 것으로 믿어지는 것은, 바로 ‘물의 문명’이라고 불리는 신석기문화가 당시의 큰 강과 해안을 따라서 퍼져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기 구석기시대에만 해도 백두산 흑요석이 1,500㎞ 이상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걸 보면 사람의 이동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일어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에 살았던 원제주인은 아마도 범(凡)동아시아계 주민이었을 것이다.
고산리 앞바다에서 일어나는 상상
원제주인이 도래하였을 때 고산리의 당산봉과 수월봉, 바다 위에 공룡 등짝처럼 떠 있는 차귀도 등의 섬들은 육지 위에 솟은 오름이었을 것이다. 해수면이 낮았을 그 시절에는 동해로 흐르는 강가의 마을에서 지평선 멀리 한라산을 배경으로 솟은 오름들을 쳐다보면 사냥터로 이동하는 무리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 무리 중에는 요즈음 자구내 포구의 가게에서 파는 동해 오징어처럼, 멀리 연해주에서 온 사람도 있었을 듯싶다. 뜬밭에 있는 작은 박물관 너머로 펼쳐지는 장관의 낙조 풍경에서 일어나는 고고학적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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