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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나와 주변을 돌아볼수록 절박해지는 기도

입력
2023.02.02 20:00
25면

편집자주

'호크마 샬롬'은 히브리어로 '지혜여 안녕'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지혜문헌으로 불리는 잠언과 전도서, 욥기를 중심으로 성경에 담긴 삶의 보편적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 ©게티이미지뱅크

사도 바울 ©게티이미지뱅크


고매할 거라는 기대와 다른 기독교의 '구원' 교리
기독교의 절박한 구원을 보여주는 시편의 구절들
절박성이 강해질수록 더 멀어지는 품위 있는 기도

'주여 삼창하고 다 같이 부르짖어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열렬한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하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신학대학과 교회에서 일하다 보니 자주 보는 일이지만 나는 점잔 빼느라 공기 반 소리 반으로 주님을 부른다. 어쩌면 내가 그리 절박하지 않은가 보다.

종교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다소 고매하고 숙연한 무언가를 생각한다.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바울의 다음 말을 보시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3:4-7). 참으로 고상하지만, 로봇이나 천사가 아닌 이상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 같지는 않다. 실은 이 말을 직접 했던 바울이 한 성깔 하는 분이었다. 주변 동료를 꽤 심란하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 신앙의 고매함은 아마도 예수의 다음 말에 절정에 이를 것이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희 원수도 사랑하라"(마태복음 5:39-44).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여 잠잠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신의 아들이었다. 반면 인간의 아들인 나는 오히려 십자가를 뽑아 원수에게 휘둘러 대지 않았을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윤리적 황금률을 예수가 말하기도 했지만, 기독교가 숭고한 이유는 그저 고매한 진리를 가르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구원'에 있다. 어려움과 위험에 빠진 이를 끌어내어 '구출'하는 것에 교회의 진정성이 있다. 기독교가 숭고한 이유는 고매하게 가르쳐서가 아니라 절박하게 구원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시편을 보면 의아하다. 원수도 사랑하라 했건만, 여기는 원수를 처단해 달라고 아우성친다. 시편은 신앙하는 인간의 매우 솔직한 반응을 담아낸 책이다. 그래서 신학적 정합보다는 울고 웃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크다. 원수의 칼이 목에 와닿는 절박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누구든 하나님께 이렇게 울부짖을 것이다. "원수가 나에게 악한 짓을 하였으니, 주님이 내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진실하심을 다하여 그들을 전멸시켜 주시기를 빈다"(시편 54:5). 멸망을 바랄 만큼 당한 고통이 처참하다. 어느 시편은 원수들이 "몰래 그물을 치고 구덩이를 파며, 이유 없이 내 생명을 빼앗으려는" 악한이라고 한다. 그리고 억울하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모친상을 당한 사람처럼 상복을 입고 몸을 굽혀서 애도하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환난을 당할 때에, 오히려 그들은 모여서 기뻐 떠들고, 폭력배들이 내 주위에 모여서는 순식간에 나를 치고, 쉴 새 없이 나를 찢었다"(시편 35:7, 14-15).

원수가 나의 목숨마저 노린다면? 너무 절박해서 심지어 하나님을 윽박지른다. "주님, 언제까지 보고만 계시렵니까? 내 목숨을 저 살인자들에게서 건져 주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이 생명을 저 사자들에게서 지켜 주십시오"(35:17).

절박하면 누구든 부르짖는다. 무신론자도 물에 빠지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하나님을 찾는다.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절박하게 말한다. 꼭 원수가 목에 칼을 들이대지 않아도, 인간을 근본적으로 처벌받기 직전인 죄인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이를 신학적으로 고매하게 이해하기도 하지만, 어린아이와 같이 정말 절박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아마도 누구든지 그 절박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점잖고 조용한 걸 좋아한다. 그렇다고 나와 이웃과 미래의 절박성을 간과하려 하지는 않는다. 구원의 절박성 때문에 교회는 극성맞는 것이 정상이다. 진정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사회를 보니 염려가 넘쳐, 기도를 그저 품위 있게 하기가 어렵다. 절박하기 때문이다.

기민석 목사·한국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대체텍스트
기민석목사ㆍ한국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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