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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억압 속에서도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이악스러운' 북한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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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영화, 드라마, 가요, 연극, 미술 등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젠더 이슈를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봅니다.
"돈을 번 혜원은 집안 살림을 모두 다 바꾸었다. (...) 남한에서 유행한다는 밥가마를 큰돈을 주고 들여놓고, 냉장고와 세탁기 그리고 정수기도 샀다. 아들 공부에 필요할 것 같아 컴퓨터도 얼마 전에 장만했다. (...) 아들 공부를 위해서 가정교사도 따로 고용했다."
'시장화'가 진전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국영주유소의 기름을 빼돌리는 기름장사로 상당한 자본을 모아 세간살이를 첨단의 것으로 바꾸고, 경쟁 사회의 바로미터인 사교육에 골몰하는 '북한 여성'의 이야기라니. 생생해도 너무 생생하다.
북한 연구자 김성경 북한대학원대 교수의 신간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창비)'에는 전형을 깨고 살아남는 '북한 여성'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북한 매체에서 선전을 목적으로 활용한 영화, 신문기사, 다큐멘터리나 탈북민 출신 소설가의 텍스트에, 연구자의 심층 인터뷰 결과물과 연구 지식을 동원해 그 속에 담긴 여성들의 삶을 서사로 복원해냈다.
'천리마 노동영웅'으로 잘 알려진 길확실이 한 예. 그는 생산 활동의 질적 제고를 목표로 하는 '천리마작업반운동'에 참가해, 일터의 혁신을 이뤄낸 영웅적 인물. 그의 삶은 1961년 '천리마 작업반장의 수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노동자들이 읽고 학습하는 교재로 활용됐고, 2020년 조선중앙티비의 '천리마 시대의 녀성영웅들:인간 개조의 선구자 길확실'이라는 기록영화로도 제작됐다.
저자는 기존 사실에 자신의 젠더적 관점을 끼얹어 '대중 영웅'이 아닌, 주저하고 희생하는 여성 길확실의 면모를 재해석해낸다. 그간 연구자로서 150명 넘게 만난 북한 출신 인물들과의 심층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삶의 곳곳에 뿌리내린 젠더 관습은 그대로 남은 채 노동자라는 새로운 역할까지 하게 된 한국전쟁 전후 여성이 갖게 된 혼란과 두려움, 내적 갈등 등을 길확실의 삶에서 길어낸다.
책 속에는 저자가 실제 만난 북중 접경 지역의 북한 여성들과 조선족, 그리고 탈북민과 재일교포 등의 목소리도 풍성하게 담겨있다. 이 여성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다면적 주체로 거듭난다. 중국 옌지의 '순영 할머니'가 대표적인 예. 중국에서 태어난 뒤, 1962년쯤 북한으로 귀향한 뒤, 아들, 딸, 손자, 손녀에 이르는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나왔다. "우리 조선의 여성들은 어떻게 든 살아남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꼿꼿한 성정의 그는, 취약한 신분 때문에 성산업에 내몰리기 쉬운 북한 여성에게 일자리와 쉼터를 알선하는 일을 병행한다.
'왜 한반도의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서, 혹은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유로 그토록 고된 삶을 감내해야만 했나.' 개별 여성의 삶이 보여주는 주제의식은 이같이 요약된다. '이악스럽다(억척스럽다의 북한말)'로 대변되는 생존주의적 의식과 실천이 북한 여성들의 삶에 아로새겨진 데에는, 여성들의 주체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국가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는 것. 그러나 이들은 강건한 억압 속에서도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고, 욕구에 솔직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저자는 "아무리 고단한 상황이나 혹독한 운명 앞에서도 나름의 행위주체성을 발휘하려는 여성들의 힘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한다.
하나, 허구와 실재, 1인칭과 3인칭을 분방하게 넘나들며 '있을 법한' 북한 여성의 삶을 재구성해낸 방법론에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저자는 이를 두고 "북조선 여성들과의 인터뷰 내용에 작가적 상상력을 덧입혔다"며 "기존의 전통적인 사회과학적 글쓰기가 아닌 '산문'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고 설명한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곳, 거기서도 가장 아래에 있는 '북한 여성'이라는 존재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한 자구책이겠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작가적 개입'으로 봐야 할지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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