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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수석의 동기는 왜 이주 노동자들의 ‘대부’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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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요구에 그는 사무실 문 앞에서 어색한 포즈로 사진 촬영에 임했다. 그러다 두 명의 남성 외국인 노동자가 다가오자 얼른 사무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번엔 여성 외국인 노동자 두 명이 사무실에서 쌀 포대를 안고 나오자, “쌀 떨어졌구나” 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근처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들의 쉼터에 쌀이 바닥나서, 생필품이 있는 ‘지구인의 정류장’ 사무실에 들른 것이었다.
한겨울 추위가 매섭던 1월 25일, 경기 안산 단원구 원선로의 ‘지구인의 정류장’ 사무실에서 김이찬(57) 대표를 만났다. 캄보디아어(크메르어)를 배워서 노동자들과 대화하는 그는 이주 노동자들 사이에선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다.
2009년부터 비영리 민간단체 ‘지구인의 정류장’을 열어, 임금을 못 받거나 성폭력을 당한 노동자들을 도와왔다. “변호사나 노무사가 하는 일 같다”고 했더니, “가끔 의사 같은 일도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밤중에 병원이 없는 곳에서 목이 아프다고 전화를 해온 노동자에게 “일단 소금물로 헹궈라”라고 하고, 추후 병원에 데려가는 식이다.
그 자신은 단체 후원금 중에서 월 150만 원의 활동비를 받는다. 월세방에 살고, 자전거로 이동한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희귀해진 오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구인의 정류장’은 김 대표의 좁은 사무 공간, 회의·교육실로도 쓰는 모임방, 남성 노동자 쉼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여성 노동자 쉼터는 독립해서 따로 있다.
그날 모임방만 난방이 되고 있었다. 모임방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이주 노동자들이 자리를 피해 주려 했다. 그러자 김 대표가 한국말과 캄보디아어로 번갈아서 “딴 데는 너무 춥잖아요. 거기 있어도 돼요”라고 했다. 한쪽에선 소곤소곤 캄보디아어가 들리는 중에, 김 대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원래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 “1994년부터 2010년 정도까지 했어요. 작년까지도 이전 작품에 추가해서 만들긴 했네요.”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 ‘농장 아가씨의 꿈과 희망’ 같은 이주 노동자에 대한 것이었다. 국내 미얀마인들이 주한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벌인 민주화 투쟁을 다룬 ‘데모크라시 예더봉’으로 2000년 한국독립단편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영상보다 더 절실한 것들이 보였다.
이주 노동자들에 관한 관심은 1999년부터 있었다. “외국에서 온 낯선 젊은이들이 낯선 나라에서 뭔가를 하는구나,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하는 호기심이 있었죠.”
이주 노동자들의 ‘영상 공부방’으로 시작한 ‘지구인의 정류장’은 주로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후원금이 넉넉하지 않아서 제 활동비는 한 달에 150만 원선이에요.” 크메르노동권협회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월 1만 원씩 내 충당하기도 한다. 그 혼자 꾸리는 것은 아니다. 운영회의에 참여하는 활동가는 그를 포함해 5명이다.
약간의 걱정을 담아서 “퇴근은 하세요? 여기서 주무세요?” 하고 물었다. “퇴근하지요. 월세방이 있어요.”
얼마나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찾아오는지 물었더니, “노동청(고용노동청)이나 경찰 진정으로 사건화되는 것만 한 해 50건 정도”라고 답했다. 성폭행당한 노동자 구제활동을 하고, 병원에 긴급히 가야 하는 이들까지 합치면 한 해 150~200명 정도를 새로 만난다.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해도, 소송을 내도, 임금을 못 받는 경우가 있다. “체불된 금액의 50% 정도라도 받고 해결되는 경우가 절반 정도예요. 100% 인정되는 경우는 10% 미만이죠.” 나머지는 합의를 하지 못해 고용주는 처벌을 받고, 노동자는 임금 대신 고용청에서 주는 체불금품확인서를 받을 뿐이다. 폭행이나 성폭행, 성희롱 사건 땐 경찰서에도 간다.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예컨대, 고발인·고소인 조서 써봤을까요? 대부분 20대 초반인데요. 필요한 사안들을 잘 정리하게, 항변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거죠.”
고용노동부를 상대로 전문적인 내용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때는 도와주는 노무사에게 적은 수임료를 주고 맡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김 대표는 노동자의 위임장을 써서, 전국 고용청을 직접 찾아간다.
“한 해 사건이 50건 정도가 되면, 최소 50번은 직접 가죠. 두 번 가야 하는 경우도 있고요. 노동청이 통역자를 잘 대주지를 않아요. 아주 드물어요. 노동자가 그 복잡한 상황, 어려운 상황, 노동 시간에 관한 것, 기록에 관한 것을 진술해야 하잖아요.” 캄보디아어에 능숙한 그가 가는 이유이다.
꼭 사건이 있어야 노동자들이 그를 찾는 건 아니다. “허리가 아파요”라고 전화를 하는 식이다. “허리가 어떻게 아파요? 뼈가? 피부가?” 이렇게 되묻고는 방법을 찾는다. 낯선 한국땅에 온 이국의 젊은이들은 모르는 것, 두려운 것투성이다. 그에게 묻는다. “제가 건강보험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해요?” “사장이 시켜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를 냈는데, 경찰이 면허 없다고 벌금 200만 원을 물린대요. 무서워요. 사장님이 제 월급에서 까겠대요.”
전국 어느 고용청까지 가봤는지 물었다. “목포 양산 부산… 포항도 갔네요.” 조사기관도 “선생님 꼭 오시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고용청도 노동자들의 진정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그가 필요한 것이다. 그는 “경찰은 반드시 통역을 대동하는데, 노동부(고용청)는 안 한다(의무가 아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통역이 의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근로자분이 필요하다고 하면 각 지청 지역협력과 외국인력팀에서 통역원을 지원하다”며 “특정 언어 통역원 위촉이 안 된 경우 다른 지청 통역원이라도 지원하다”고 말했다.
어떤 근로감독관이 “변호사 구해오라”고 한 적이 있단다. 그래서 김 대표가 “감독관님이 구해주실건가요?”라고 되물었다. 임금 체불액이 400만, 500만 원인데, 변호사에게 맡기려면 그에 맞먹는 수임료를 줘야 한다.
‘지구인의 정류장’은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구심점이다. 김 대표는 “제한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소통 때문에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많이 온다”고 말했다.
다른 국가 출신 노동자들이 커뮤니티가 있어서, 그쪽으로 연결해 주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 노동자 상담은 ‘이주민센터 동행’이 있고요. 재한베트남공동체도 있어요. 필리핀 노동자들은 ‘오산 이주민센터’와 공동체 조직 ‘카사마코’가 있고요. 네팔은 이주노조 위원장이나 상담하시는 분이 네팔분이라 그쪽으로 연결되고요. 청주이주민센터에 네팔 출신 통역자가 있으니까 그리도 연결을 하죠.”
고용허가제, 즉 비전문 외국인 근로자(E-9 비자)로 국내 체류하고 있는 인력은 16개국 24만5,000명가량. 올해엔 역대 최대인 11만 명이 들어온다.
김 대표는 “이게 사람이 없는 곳에 보내는 것이거든요. 젊은 사람이 없는 곳이죠. 어디서 살아요? 집이 있어요? 교통수단이 있어요? 버스도 하루에 두세 번밖에 안 가는 곳도 있어요. 문화생활도 없어요. 그거에 대한 고려를 안 했단 말이에요. 노동부는 그냥 몇 명이 필요하다, 그것뿐이에요”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열악한 비닐하우스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젊은이들이 흔한 사회가 됐다.
또 근로기준법 적용을 피하려 아내, 남편 등의 이름으로 5인 미만으로 쪼개는 게 흔하다. 현행법상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기준법 조항 중에서 적용되지 않는 사항이 많다. “지난 1, 2년 사이에 이주 여성 노동자들이 농촌에서 깻잎, 시금치 농사 이런데 많이 투입됐어요. 어느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은 17명이 일해요. 그런데 다 쪼개서 의무를 확 죽이는 거죠.”
그는 “지금의 제도가 사용자에게만 ‘꿩 먹고 알 먹고’이다”고 말했다. “비닐하우스 숙소 만들고 1인당 거주비로 30만 원씩, 10명이면 300만 원 받아 가요. 지나치게 많은 노동을 하면서 건강보험료도 지역가입자로 월 14만,15만 원을 내죠. 월급 170만, 180만 원 받으면서 말입니다.”
외국인 근로자를 쓸 경우, 사업자는 임금체불보증보험에 의무 가입해야 한다.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았다면 주민등록번호로도 가입할 수 있다. 최대 400만 원까지 임금을 보장해준다. 하지만 이런 의무보험 가입조차 지키지 않은 경우를 김 대표는 흔히 본다. “임금체불보증보험에 가입하면 임금을 못 줄 때 체당금으로 대지급할 수 있는데, 그것도 제대로 안 되는 거죠.”
개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서울대 법대 84학번으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봉욱 전 대검 차장이 동기이다. 최고 학벌이 주는 ‘특권’을 놓게 된 과정이 궁금했다. 처음엔 조금 머쓱해하더니,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대학 와 보니 청소년 때 가졌던 세계관이 완전히 거짓말인 거예요. 한 해에 17, 18명씩 죽었어요. 데모하다가 몰래 끌려가서 죽거나, 자살하거나, 의문사하거나. 1학년 2학기 때는 다들 수업거부를 했지요. 내가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한 사람이 법대 선배였어요. 이런저런 사회운동 계획을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전두환 정권이 가기도 전에, 88올림픽을 하기도 전에, 사시를 봐서 판사를 하겠다는 거예요. 지금 잘나가는 사람이죠.”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배신감은 강했다. “사실 현실적인 욕망이죠.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없는 상황이죠. 하지만 한편으론 그때 죽는 사람들을 보면 순박하거나 착한 사람들이 죽는 것 같더라고요. 우직하고 순박한 친구들이요.”
그는 사법시험을 치른 적이 없다. 대학 3학년 때 사회를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노동자들을 상대로 야학을 했다. 우병우 전 수석은 기억에 없고, 봉욱 전 차장은 기억한단다. 몇 년 전 검찰에서 퇴임한 봉 전 차장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봉 전 차장은 검찰 내부에서 점잖기로 유명했다. “제 기사를 봤다더라고요. 30년 만의 연락이었어요. 그 친구는 학교 다닐 때도 친절하고 말을 참 곱게 했었죠. 촌놈인 저랑은 달랐어요.(하하)”
그는 행복이나 성공에 대한 기준이 다른 것일까, 아니면 행복이나 성공을 아예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일까. 이에 대해 물었더니 즉각 답했다. “그럴 리가(중요하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짧은 제 삶 행복하고 싶죠. 의미 있고 싶지요.”
김 대표는 진지하게 말했다. “종국적인 어떤 것을 가질 수 없고, 살면서 완성할 수는 없어요. 호모사피엔스로서 단 한 번으로 추정되는 삶을 살고는 흙이 되고 구름이 되겠죠. 어떤 게 행복한 삶일까, 어떤 게 의미 있는 삶일까, 어떤 게 성공한 삶일까, 저도 궁금해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요새 느끼는 것은, 어떤 때 즐거운가 보면요. 바로 앞에 닥친 부당함 속에서, 부당함을 당한 속에서 어쩔 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그건 이런 것일 수 있어라고 안내를 하고, 그 안내로 인해서 그 사람이 너무 행복해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거죠(그게 가장 즐겁죠). 이것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지금 나를 그렇게(행복하게) 해요.”
그에게 “보통은 의미 있는 일을 하더라도, 한 발은 생계에 담그고 ‘가욋일’로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생계를 보장받지 못해 불안하지 않느냐’는 뜻이었으나, 그는 재깍 “그래서 저는 복이 있죠”라고 답을 했다. “제가 굶은 건 아니니까요.” 노후 걱정은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젠 걱정되더라고요. 민폐를 끼치면 안 되잖아요. 주변에서 하도 이야기하길래, 몇 년 전에 국민연금도 가입했어요”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본인의 이야기를 할 때도 자꾸 이주 노동자 이야기로 돌아갔다. “2011년부터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비디오 교육을 했어요. 우리 사회는 강자들이 많을 것들을 누르고 작은 욕망들을 무시하죠. 이런 빡빡한 사회에 어쩌다가 떨어지게 된 젊은이들이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산다, 이런 것을 보고 느끼고 산다, 당신네 나라에서 산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지구인의 정류장’은 언제까지나 존재할까. “2030년에 끝내려고요. 만 65세까지요. 저도 늙었어요. 돈 걱정은 돼요. 새로운 기술을 익혀서, 노동자들의 삶에 유익한 뭔가를 하고 싶어요.” ‘은퇴해서도’ 이주 노동자들 곁에 있겠단 얘기다. “그분들만 절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분들의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죠.(하하)”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모임방 한쪽에 있던 노동자가 아이스크림을 가져와 건넸다. 기자는 날씨가 추워 “괜찮다”고 했지만, 김 대표는 아이스크림 콘을 받아 복스럽게 먹었다. “이거 누가 산 거야?” 그가 캄보디아어로 묻자, 앳된 여성 노동자가 손을 번쩍 들며 웃었다.
한쪽 벽엔, 지난해 12월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이주 노동자들이 붙여놓은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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