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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진실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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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을 가리켜 '탈진실의 시대', 즉 객관적 사실에는 관심 없이, 저마다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신념을 중시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에 대한 물음도 갖지 않고 그 답을 알고자 애쓰지도 않기에, 각자 자기편에 서서 참이라 주장하면 참이 되고 거짓이라 주장하면 거짓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진실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그야말로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누군가 사실을 부정확하게 진술하거나, 진정성이 없는 말을 할 때 흔히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한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그 내용에 '진실'이라는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튼소리, 헛소리, 흰소리, 쓸데없는 소리, 말 방귀 등 '알맹이가 없는 말'을 뜻하는 동의어는 우리말에 수도 없이 많다. 진실이 담기지 않은 말은 '말'이 아니라 그저 '소리'에 불과하다는 통념이 빚어낸 동의어가 이렇게나 많다는 건 그만큼 흔하게 경험되기 때문일 것이다. '말에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우리의 오랜 믿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허튼소리일지언정 모두 완전한 거짓은 아닐 것이다. 말에 담긴 진실성의 정도에 따라 여러 경우가 존재하므로, 명백한 진실과 완전한 거짓 사이에는 의도치 않은 정보 오류와 의도한 사실 왜곡의 정도에 따라 일종의 '그러데이션'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한 말과 거짓말 사이에 그토록 많은 '알맹이 없는 말'의 동의어들이 생겨났을 것이고, 거짓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사람들이 용인하는 범위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도덕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 교수는 오늘날 허튼소리가 만연해 있다고 개탄한 바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도, 허튼소리에 대해서는 관대하기에 이처럼 만연한 사회현상이 되었다고 말이다. 말이 진실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확성'과 주관적 사실에 대한 '진정성'을 충족해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사실의 정확성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의견을 가질 수 있고 표현할 자유가 있지만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은 그 말에 아무리 절절한 진심이 담겨있다고 할지라도 진실과 거짓의 연속선 위 어디쯤일 뿐, 외적 타당성이 모자란 채 주관적 경험의 진정성만을 앞세운 '반쪽 진실'인 셈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오늘날 같은 상대성의 시대에는 검증되지 않은 사적 의견이 그럴듯하게 포장된 채 널리 퍼지기 쉽다. 그렇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역시 오롯이 개개인의 몫이 되었다. 범람하는 사적인 주장들을 사실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 없이 무분별하게 수용한다면, 개인의 판단 오류와 사회 혼란은 자명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 혼란은 프랭크퍼트 교수가 지적한 바 있듯이,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의도적으로 부정확한 진술을 함으로써 진실을 호도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러니 작금의 사회현상을 이들 탓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자라나는 후속 세대들에게 건강한 사회를 물려주는 것이 현 세대의 책임이라면, 진실에 무관심한 대중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말을 할 때 진실을 담기 위해 주의해야 하겠고,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는 진실을 분별하고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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