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81>'후라리맨' 대신 '이쿠멘’을 응원하는 일본 사회

입력
2023.01.28 04:40
13면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여성이 육아를 전담하던 일본에서도 휴직계를 내고 육아를 분담하는 남성의 비율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회사일에 매달리던 일본 샐러리맨에게도 사적인 삶과 행복을 중시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확산되고 있는 중요한 신호로 여겨진다. 일러스트 김일영

여성이 육아를 전담하던 일본에서도 휴직계를 내고 육아를 분담하는 남성의 비율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회사일에 매달리던 일본 샐러리맨에게도 사적인 삶과 행복을 중시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확산되고 있는 중요한 신호로 여겨진다. 일러스트 김일영

◇‘이쿠멘’, 육아에 진심인 훈남

일본에서는 ‘육아에 진심인 아빠’를 ‘이쿠멘’이라고 부른다. 육아를 뜻하는 ‘이쿠지'(育児)에 얼굴 생김새나 용모를 뜻하는 ‘멘'(面·영어 단어 남성의 복수형 men에서 따왔다는 일설도 있다)을 합성한 신조어다. 이 말이 탄생하기 전에 ‘이케멘’이라는 은어가 먼저 유행했다. ‘잘나간다’는 뜻의 ‘이케루’에 ‘멘’이 붙은 말인데, 잘생긴 용모의 훈남을 지칭한다. 이케멘에서 파생된 이쿠멘이라는 호칭에는 ‘육아하는 남성은 매력적’이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도 하겠다.

일본에 살 때 주변에 이쿠멘이 적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보육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일을 전담하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열리는 연구회에는 망설임 없이 불참을 선언하는 동료도 있었고, 연구회나 세미나 모임에 어린 자녀를 동반하고 참석하는 동료도 있었다. 나의 이런 경험이 일본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몸담았던 학계는 비교적 자유롭고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남성이 육아나 가사를 돌보는 것을 흔쾌히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일반적인 직장 문화는 그와는 거리가 멀다. 남성이 육아나 가사를 돌보는 것에 대해 회사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고 프로의식이 결여되었다고 평가절하하는 인식이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남성 직장인이 보육원에 있는 아이의 마중을 위해 야근을 거절하거나 육아 휴직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본 사회는 여전히 이쿠멘에게는 살기 힘든 곳이다.

◇“이쿠멘을 늘리자”, 일본 사회 저출산 문제의 해법

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전체 인구 대비 고령자 비율이 30%에 육박하는, 대표적인 ‘초고령화사회’(65세 이상 고령자가 인구의 21%를 초과하는 사회)인 만큼, 젊은 부부가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것을 꽤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낮은 출산율의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이 육아의 어려움이다. 젊은 부부가 주변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처럼 할머니, 할아버지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손주를 키워주는 경우도 흔치 않다. 한국에서는 도우미를 고용해 가사를 ‘외주’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에서는 사적인 공간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도 큰 편이다. 갓난아기 때부터 맡길 수 있는 보육원이나 유치원도 있지만, 만성적인 시설 부족, 인력 부족으로 경쟁률이 높을 뿐 아니라, 운 좋게 입소했다고 해도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돌보는 부담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결국 육아를 위해서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직장을 그만두고 주부(主婦) 혹은 주부(主夫)로 전업을 선언해야 하는데, 커리어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회적, 심리적 압박을 받는 쪽은 여성이다. 일본에서도 ‘육아는 여성의 일’,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여성이 스스로 전업주부의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사회는 남성도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여성의 일방적 육아 부담을 남성에게 분담케 함으로써 결혼과 출산의 걸림돌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육아하는 남성을 지원하는 ‘이쿠멘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기업에서도 남성의 육아 휴직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도록 법률을 강화하고 있다. 이쿠멘이라는 말도, 육아하는 남성이야말로 현대 사회에 걸맞은 매력적인 남성상이라는 이미지 전략에 의한 것이다. 2020년에는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주목받던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환경상이 아내의 출산 직후에 공식적으로 육아 휴직을 선언해 화제가 되었다. 기껏해야 12일에 불과한 짧은 휴가였던 만큼 그가 대단한 육아를 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만, 일거수일투족 눈길을 끄는 대표적인 이케멘 정치인이 당당히 이쿠멘 전업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일본의 남성 직장인이 출산, 육아를 위해 휴가를 쓰는 비율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하니, ‘이쿠멘을 늘리자’는 계획이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발표에 따르면, 2010년대 초반에는 1%대에 머물렀던 남성의 육아휴직률이 2021년에는 13%대로 올라섰다고 한다. 여성의 육아휴직률(85%)에 비하면 여전히 현저히 낮은 수치이지만, 일본 사회의 남성 중심주의를 대변하는 직장 문화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남성도 사적인 삶에서 행복을 찾겠다

일본 샐러리맨의 가혹한 근무 환경은 잘 알려져 있다. 출퇴근 시간이 엄격하고 야근도 많을뿐더러, 업무가 끝난 뒤에는 빈번히 접대나 회식 자리에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 늦은 퇴근 때문에 어린 자녀와 대화하기 어렵고, 모처럼의 주말에는 주중에 쌓인 피로 때문에 에너지 고갈 상태다. 일본어로 하릴없이 어슬렁대는 모양을 ‘후라후라’라고 하는데, 퇴근 후에 귀가하지 않고 집 근처를 배회하는 샐러리맨을 풍자한, ‘후라리맨’이라는 말도 생겼다. 오랜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다 보니 집이 불편하고, 아빠가 없는 생활에 익숙한 가족도 그의 존재를 반기지 않는다. 빡빡한 외벌이로 양육비와 생활비를 벌다가 가족에게서 소외된 채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것이니, 이보다 더 처량한 신세가 있을까? 엄마가 육아와 가사를 전담한다고 해서 아빠의 삶이 고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 주변의 이쿠멘들은 적어도 샐러리맨보다는 훨씬 충만한 삶을 사는 듯하다. 가사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보다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서 느끼는 만족과 행복감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자녀의 뒤치다꺼리는 힘들지만, 요리 솜씨가 좋아져서 보람이 있다”라든가, 혹은 “육아휴직으로 수입이 다소 줄어도 지금이 아니면 어린 자녀의 성장을 지켜볼 수 없다는 생각에 기꺼이 감수한다”고도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이라는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질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깥일에 진심인 여성도 있지만 집안일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남성도 있다. 여성이 커리어를 추구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이 중요한 만큼 남성이 전통적으로는 여성의 일로 치부된 사적인 영역에 발을 들이고 활약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문화도 중요하다. ‘이쿠멘을 늘리자’는 시도가 과연 일본 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젊은 층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은 육아가 부담스럽다는 한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쿠멘을 장려하는 일본 사회의 움직임은 여성에게 쏠리는 육아와 가사 부담을 덜어 준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에게 회사 일에 못지않게 사적인 삶과 행복을 중시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