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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 우리가 적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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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부자거리 ‘테헤란로’는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7년에 생겼다. 고람레자 닉페이 테헤란 시장이 방한해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우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상대국 수도에 각각 테헤란로와 서울로를 만들자”고 제안한 결과다. 새마을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이란 팔레비 왕은 박 대통령을 자국에 초청까지 했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이슬람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붕괴하면서 무산됐지만.
멀리 떨어진 두 나라가 친분을 쌓은 건 1973년 1차 석유파동이 계기였다. 중동 연합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시작된 4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의 개입으로 이들이 패하자 복수심에 석유 생산량을 줄여버렸다. 산유국들의 담합에 1년 만에 유가는 4배나 폭등했고 중화학 산업 육성을 내건 우리 정부도 위기였다. 산유국들이 기존 계약을 파기하며 기름값을 비싸게 부를 때 안정된 가격에 원유를 공급해준 나라가 이란이다. 우리도 근면성실로 무장한 노동자를 파견해 이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이 중동 특수를 누리면서 양국은 말 그대로 윈윈(win-win)했다.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UAE의 적은 이란”이라 했다. 대선 후보 시절 페이스북에 ‘주적은 북한’이라 쓸 정도로 적(敵)이란 단어에 꽂힌 듯한 윤 대통령의 말투가 무의식 중에 나온 걸까. 타국의 대외관계를 오지랖 넓게 단정한 이유를 모르겠다. 전 세계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인 글로벌 시대에 특정국을 적으로 규정하기도 힘든데 말이다.
“현지에 파병된 장병 격려 차원”이라는 해명은 아찔하기까지 하다. 이명박 정부 때 원전 수주를 대가로 UAE에 ‘유사시 한국군을 자동 파병하겠다’는 비밀 군사협정을 체결하지 않았나. 5년 전 전말이 드러난 이 협정은 지금도 유효한 것으로 알려졌다. UAE와 이란 간 전쟁이라도 나면 우리 군을 파병하겠다는 군 통수권자의 선제적 선언으로도 들린다. 더구나 윤 대통령이 UAE를 ‘형제국’으로 칭하면서 이란은 우리 적이 돼버렸다. 형제의 적도 적일 테니. 말 폭탄을 주고받을 상대가 북한 말고 더 늘었다.
한때 돈독했던 양국은 이란의 핵개발로 복잡해졌다. 우리가 미국 주도의 제재에 동참해 이란 계좌를 동결하면서 이란에 갚아야 할 석유대금 70억 달러를 못 주고 있다. 대사관은 물론 이란 유학생도 수교국인 한국에 계좌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처지가 됐다. 그런 와중에 2년 전 우리 국적 선박이 이란에 나포됐다. 우리는 해적에 피랍될 때나 보내던 군함을 급파했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외교부 브리핑룸은 윤 대통령이 순방만 다녀오면 북새통이 된다. 지난해 6월 나토 정상회의 최초 참석 성과에 대한 자료를 잔뜩 준비한 외교부는 ‘민간인 동행 논란’ 관련 질문만 쏟아지자 진땀을 흘렸다. 윤 대통령의 ‘바이든 날리면’ 논란에는 외교부가 총대를 메고 출입 언론사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이번에도 뒷감당은 외교부 몫이다. ‘대통령 발언은 최근 양국 관계의 민감성을 전혀 고려 못 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외교부는 제대로 답을 못 했다. 이란을 적으로 만든 것이 현직 대통령의 어이없는 한마디라면, 최근 살얼음판을 오간 양국관계 복원을 위해 애썼던 우리 외교적 노력이 너무 허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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