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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마시면 설사, 가게엔 통조림만..."아이들부터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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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전쟁의 최전선에 태평양 섬나라들이 있습니다. 해발 고도가 1~3m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들은 지구 온난화로 생존을 위협받습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변 침식과 해수 범람이 삶의 터전을 빼앗은 지 오래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14개국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 세계 배출량의 1%가 안 됩니다. 책임 없는 이들이 가장 먼저, 가장 장 큰 피해를 당하는 부정의이자 불공정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에 당신의 책임은 없을까요? 한국일보는 키리바시와 피지를 찾아 기후재난의 실상을 확인하고 우리의 역할을 고민해 봤습니다.
#. 이달 10일(현지시간) 키리바시 타라와 섬 베티오의 산도비드로 커뮤니티(행정구역 '동'에 해당).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 루시 로웨인(55)은 "여기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은 물"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올해 물 사정은 유난히 심각하다. 1월은 우기인데 몇 주째 비 소식이 없다. 마을 지도자 격인 로웨인 부부에게 주민들이 "제발 물을 달라"고 찾아오지만, 속수무책이다. 생활용수는커녕 식수도 없다. 마을은 말라붙고 있었다. 마른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눈이 닿는 어디든 모래가 쌓였다.
섬나라 키리바시는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물이다. 그러나 마시고 쓸 물은 없다. 해수면 상승으로 바닷물이 넘쳐 지하수가 오염된 탓이다. 곳곳에 우물은 많지만 퍼올린 물엔 소금기가 너무 많아 변기 물로만 겨우 사용한다. 섬나라의 주요 식수 공급원은 '담수 렌즈'라고 불리는 바닷물 위 담수층이다. 해수면이 0.1m만 높아져도 담수층의 물 저장량이 60% 줄어든다는 연구도 있다.
산도비드로에서 식수를 구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①우선 키리바시의 수자원전력공사인 공공시설위원회(PUB)가 설치한 파이프라인을 통해 물을 공급받는 방식이다. 그러나 물이 항상 나오지 않기 때문에 관 아래 양동이를 받치고 있다가 물이 나올 때마다 모아 둔다. 양동이가 다 차면 물탱크에 부어 저장한다. 루시는 "물이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물탱크의 물을 극도로 절약해서 써야 한다"고 했다. 샤워는 사치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은 소금기와 기름으로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래도 부족하면 ②아동 권리 비정부기구(NGO) 차일드펀드가 제공한 바닷물 정화 탱크를 사용한다. 차일드펀드는 유치원이 있는 마을에만 탱크를 공급하는데, 산도비드로에도 유치원이 있어 운 좋게 지원받았다. 하지만 탱크의 해수 정화량은 하루 50~60리터에 그친다. 탱크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유치원 방학 기간에만 가동할 수 있다. 개학을 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최후의 방법은 ③빗물이다. 그러나 빗물을 받아 두는 빗물 탱크는 모기 유충 소굴이 되기 일쑤다. 오염된 빗물을 마셨다가 설사와 복통에 시달리는 일도 흔하다. 루시는 "요즘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왜일까. "요즘에는 빗물 탱크에 물이 차는 족족 다 써버리기 때문에 모기가 알을 낳을 시간도 없다."
지구 온난화는 키리바시 주민들의 식생활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해수 범람으로 가뜩이나 척박한 토양에 염분이 스며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까닭이다. 기후변화로가뭄과 건기가 길고 잦아진 탓도 크다.
산도비드로의 아침 밥상에 오르는 음식은 밥과 생선이 전부다. 어느 집 식탁을 봐도 채소나 과일은 없다.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마을 아이들의 손에는 라면 봉지와 정체 모를 가루가 들려 있다. 물에 타 먹는 분말 주스란다. "채소나 과일은 언제 먹느냐"고 묻자 아이들은 "그런 건 원래 잘 안 먹는다"고 고개를 저었다. 마을 입구 슈퍼마켓 찬장에도 갖가지 수입 통조림만 가득했다.
극단적인 식단은 건강을 위협한다. 키리바시의 성인 비만율은 46%(2016년 기준), 당뇨 발병률은 22.1%(2021년 기준)에 달한다. 각각 전 세계 평균의 3배, 2배가 넘는 수치다. 루시도 10년 넘게 당뇨를 앓고 있다. 식단 때문인 걸 알지만, 바꿀 방법이 없다. 베티오 병원의 유일한 의사인 테아오토이 투베이아(34)는 "채소가 부족한 것도 문제이지만, 당류 과다 섭취도 심각한 수준"이라며 "당을 많이 먹으면 몸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급속도로 증가하는 인구도 베티오의 생활난을 악화시킨다. 베티오 중심가 2차선 도로 양옆으로는 주택들이 성냥갑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다. 고층 건물이라곤 한 채도 없는 베티오의 최대 인구 밀도는 1㎢당 1만5,000명으로, 서울(1㎢당 1만6,181명)과 비슷하다. 밀집이 심한 탓에 베티오에선 한센병과 결핵 등 치명적 감염병이 위력을 떨친다. 감염병이 돌 때마다 수천 명이 동시에 앓는다.
인구 밀도가 높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베티오는 키리바시 최대 상업 지구라서 일자리와 교육 환경을 찾아 몰려드는 사람이 많다. 보다 근본적 이유는 높은 출생률이다. 국가 전체의 공식 출생률은 2020년 기준 3.3명. 그러나 베티오 산부인과의 수간호사 타와 테잉이아는 "실제로는 가구 한 곳당 아이가 평균 8, 9명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산부의 생명이 극심한 위험에 처한 경우를 제외하면 임신중지(낙태)가 전면 금지돼 있다. 키리바시 형법은 성폭행 등 강압에 의한 임신을 한 경우에도 임신중지 시술을 막는다.
기후변화로 인한 오염된 식수와 불균형한 영양, 열악한 생활환경은 아이들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키리바시의 영아 사망률은 2020년 기준 39.2명으로, 세계 평균(27명)을 훌쩍 넘는다. 이 때문에 아기 돌잔치는 빚을 내서라도 크게 하는 문화가 있다. 아기 얼굴을 넣어 제작한 돌잔치 현수막을 집 안에 걸어놓기도 한다.
베티오 주민 게로코 게로코치는 얼마 전 치른 손주의 돌잔치 현수막을 손으로 쓸면서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돌잔치 때 애지중지 기른 돼지를 잡아서 좀 아쉽긴 해요. 그래도 손주가 잘 자라줘서 다행입니다." 게로코의 손주가 살아 갈 키리바시는 안전해질까. 인류가 기후재난을 해결할 수 있을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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