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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결혼·성매매'…"'멀쩡한 사람'도 가스라이팅 당하나요?"

입력
2023.01.23 13:0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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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살인'사건과 흡사…가스라이팅 범죄"
친밀한 관계·신뢰 바탕으로 '친절히' 시작
대부분 권위자·보호자·협력자, 인지 어렵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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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A(41)씨 부부는 2019년 10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3년간 B씨를 감금해 낮에는 아이를 돌보게 하고, 밤에는 2,000여 차례 성매매를 강요해 5억여 원을 가로챘다. A씨 부부는 B씨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이혼을 종용한 뒤 친한 후배 C씨와 강제로 결혼을 하게 하기도 했다. B씨는 결국 성매수 남성이 B씨 몸에 난 상처를 보고 경찰에 신고하고서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전문가들 ‘계곡 살인’ 사건과 흡사

'계곡 살인' 사건 피의자인 이은해와 공범인 조현수가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위해 지난해 4월 19일 인천 미추홀구 인천지법 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최주연 기자

'계곡 살인' 사건 피의자인 이은해와 공범인 조현수가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위해 지난해 4월 19일 인천 미추홀구 인천지법 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최주연 기자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강사 생활까지 했다는 B씨는 왜 3년이 넘도록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 범죄 양상이라고 분석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지난 18일 ‘YTN 더뉴스’에 출연해 “멀쩡히 대학 졸업자로 학원 강사를 하는 상황인데 무슨 심리적 지배를 당했냐고 할 수 있지만, ‘계곡 살인’ 사건 피해자 윤모(사망 당시 39세)씨도 정신질환과 지적장애가 없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었다. 두 사건은 굉장히 흡사하다”고 말했다.

가스라이팅은 폭력 등 다른 범죄와 달리 교묘해 알아차리기 어렵다. 상대방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후, 호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친절하게’ 스며들기 때문이다. 인지학자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유튜브 채널 ‘사피언스 스튜디오’에서 “가스라이터는 권위자, 보호자, 협력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서 “특히 ‘보호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나쁜 의도를 갖고 나를 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들은 관계 초반의 ‘좋았던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네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식으로 상대의 기억을 조작하고, 자신의 기대를 충족하도록 상대의 행동을 이끌어낸다는 설명이다.


가스라이팅 피해 대표 증상은 ‘무력감’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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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이 호소하는 대표적인 증상은 무력감이다. 가스라이터의 말에 불쾌함을 표시하면 “농담이었다” “네가 오해한 거다” “네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 사실은 다르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너를 위해서 한 것인데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너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식의 반응까지 돌아온다.

가스라이터를 신뢰하고 친밀하게 생각하는 피해자는, 미안함에 자신의 기준과 자신이 느낀 감정을 부정하며 ‘내가 예민했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일상생활 전반에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예컨대 지하철에서 처음 보는 남자가 욕설을 할 경우에도, 그 사람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보였길래 이 사람이 나한테 그랬을까’라는 식으로 모든 문제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식이다. 가스라이터의 의견을 묻고 따르는 일이 누적되면 결국 상대방의 지시를 무조건적으로 따르게 되며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심리적 공황 상태에까지 빠지게 된다.

‘기계교 사건’이 대표적이다. 30대 여성은 동료 학부모의 “시스템이 지시하는 대로만 따르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말을 믿고, 그가 문자메시지로 보내오는 온갖 지시를 따르다 2012년 전북 부안 한 모텔에서 7세와 10세 두 딸을 살해했다.

각종 범죄에서 가스라이팅이 거론되는 빈도가 증가하고 있지만 현행법과 제도는 가스라이팅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반면 영국은 2015년 중범죄법을 개정해 ‘친밀한 관계 또는 가족 관계 안에 통제적이거나 강압적인 행동’을 할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 강압적인 행동에는 가해자의 신체적 가해를 비롯해 심리적 가해까지 포함했다. 미국에선 한 여성이 2019년 7만5,000개가 넘는 문자메시지를 남자친구에게 보내 능력, 외모를 비난하며 자살하라고 해 실제로 자살까지 이른 사건이 있었다. 당시 미국 법원은 ‘피해자를 고립, 통제해 죽음에 이르게 한 잘못’을 물어 가해자에게 과실치사를 적용하기도 했다.


주변인의 ‘자존감 높여 주는 칭찬’이 도움

전문가들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고 느껴질 경우 고립되거나 위축되지 말고 ‘장점’을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을 찾아 만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주변인들 역시 가스라이팅 피해를 당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너는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말 대신 “너는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방식으로 자존감을 높여 주는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사실도 중요하다. 최초로 가스라이팅을 심리학 용어로 규정한 미국 심리학자 로빈 스턴이 제시한 가스라이팅 위험 신호는 다음과 같다. △자신이 애인, 배우자, 직원, 친구 혹은 자녀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지 자주 의문을 갖는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스스로 어떻게 느끼는가보다는 배우자가 좋아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무언가 굉장히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가 없다. △상대방이 윽박지르는 것을 피하고 상황이 꼬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직장에서 자주 혼란스럽고 얼빠진 느낌이 든다. △항상 어머니, 아버지, 애인 혹은 직장 상사에게 사과를 한다.


원다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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