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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피격 때도 만났는데…가장 애틋하고 정치적인 이산가족 상봉[문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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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평생 떨어져 살았으니까 할 얘기는 많지만…어떻게 (3일 만에) 다 해. 보고 싶었던 건 얘기하면 한도 끝도 없지."
이순규씨가 제20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2015년 10월 20~22일) 때 남편 오인세씨를 65년 만에 만나 한 말
오늘은 '민족의 명절' 설 연휴의 시작입니다.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가족, 친지와 모처럼 여유롭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하고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사랑하는 남편, 아내와 생이별했고 △젖먹이 어린 딸,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 평생 한이 되는가 하면 △전쟁통에 학교에 간다며 집을 나선 뒤에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바로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떠안고 살아간 '이산가족'입니다.
하나같이 애끓는 사연입니다. 6·25 전쟁 탓에 벼락같은 이별을 했으니 당연히 다시 만나야죠. 그래서 상봉행사가 시작됐습니다. 1985년 고향방문단 100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처음으로 피붙이와 만났고,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거치면서 속도를 냈습니다. 이산가족 행사는 단순히 눈물바다가 아니라 남북을 연결하는 소중한 대화와 교류의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8월을 끝으로 중단된 지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물론 현재 일촉즉발인 한반도 정세를 감안하면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갈수록 고도화하고, 특히 최근에는 무인기 침투로 군사적 긴장이 크게 높아졌으니 이산가족 상봉이 한가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도 남북에 흩어져 사는 혈육 간 만남을 주선하는 일에는 꽤 신경을 써왔습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5월 취임 이후 틈날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의 시급성을 언급하며 “빨리 만나야 한다”고 강조해왔죠. 추석을 이틀 앞둔 지난해 9월 8일에는 "남북 당국 회담을 열어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하자"고 북측에 공개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려 '강대강' 대립을 불사해왔습니다. 그런데도 보는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산가족 이슈를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인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6·25 전쟁이 끝난 지 꼭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통에 아버지와 헤어질 때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칠순 노인이 될 만큼 시간이 흘렀습니다. 가족과의 이별로 시작한 인생이 어느덧 종착역을 바라보는 기구한 상황입니다.
통계를 살펴볼까요. 북한에서 넘어온 이산가족 1세대는 이미 10명 중 6명(68.1%)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은 피란민(4만2,624명·이산가족 등록자 기준) 가운데 65.6%(2만7,949명)는 팔순이 넘은 고령자입니다. 이들 생존자 중 고작 2.5%(1,066명)만 북에 있는 가족을 한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죠.
그마저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매년 3,000~4,000명의 이산가족 1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있죠. 추세를 감안하면 올해 생존한 이산가족은 3만 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통일부는 향후 4, 5년이 이산가족 1세대가 북에 남아 있는 혈육과 만날 마지막 기회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산가족의 고령화와 기대수명 등을 감안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2027년 5월까지인 윤 대통령의 임기와 비슷하게 겹칩니다. 현 정부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는 이면에는 또 다른 의도가 엿보입니다.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로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녹일 극적인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비핵화 로드맵인 '담대한 구상'은 북한의 무관심과 냉대, 반감에 막혀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난국을 타개할 변화의 기폭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남북 당국이 주도한 이산가족 상봉은 역대 21차례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한반도에 대화협력의 훈풍이 불 때만 상봉행사가 열린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꿔 말하면 언제든, 얼마든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명박 정부 때가 단적인 예입니다. 2008년 8월 금강산 관광을 하던 박왕자씨가 북한군에 피살당했습니다. 자연히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고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죠. 이산가족 상봉도 중단됐죠. 하지만 이듬해인 2009년 추석을 맞아 상봉행사를 재개합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입니다.
특히 2010년은 더욱 극적입니다. 3월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대한민국은 충격에 빠졌고, 두 달 뒤 정부의 5·24 대북제재 조치로 한반도 정세는 최악으로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해 9월 북한 측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실무자 간 만남을 제안합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닌,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죠. 그러나 약 한 달 뒤인 10월 30일 금강산 면회소에서 남북 이산가족 533명이 재회하는 역사적 장면이 펼쳐집니다.
문제는 북한 당국엔 이산가족 상봉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임을출 경남대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우리는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적 사안으로 볼 수 있지만 북한 당국은 가장 정치적인 사안으로 바라본다”면서 “보수정권일 때도 이산가족 상봉만큼은 호응해줬는데 본인들(북한 당국)이 이익을 본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산가족의 만남을 통해 정치적으로 얻을 게 있다면 남측 제안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수용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죠. 북한은 앞서 언급한 권 장관의 이산가족 상봉 제안에 4개월째 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치를 때마다 적잖은 노력과 비용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에서는 이산가족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면서 "남한에 가족이 있으면 출신 성분이 나쁘다고 여기기에 이를 숨기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준비에도 많은 시간이 들죠. 탈북민 출신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소장은 "상봉 인원이 확정되면 전국의 이산가족을 불러 모아 약 1개월간 합숙훈련을 한다"며 "지방에 사는 이들은 피골이 상접해 우선 식사부터 제대로 시켜 때깔을 좋게 만든다"고 전했습니다. 또, 남측 가족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백두혈통'과 북한 노동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발언을 했을 때 대응하는 법을 가르치고, “은혜로운 당의 품 안에서 잘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도록 하는 등 예행연습을 철저히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양측 당국의 상황인식에 휘둘리며 늘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해 왔습니다. 당국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재개될 수 있는 셈입니다. 권 장관의 상봉 제안이 '립 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만남으로 이어지는 건 정부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떤 카드를 꺼내느냐에 따라 북한이 호응할 여지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한반도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합니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지난달 말 제8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 대신 '대적관계'라는 표현을 썼고, 윤 대통령도 11일 국방부·외교부 업무보고에서 ‘전쟁’, ‘전면전’이라는 단어를 17차례나 꺼내며 한껏 날을 세웠으니까요.
이에 대해 임 교수는 "현실적으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정치군사적 이슈와 분리돼 다뤄지기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남북이 서로를 자극하는 대결 분위기에서 한 발씩 물러나 대화 의지를 명확히 해야 상대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조언입니다. 박 교수는 “북의 도발에 맞서 강경 대응 의지를 밝히고 억제 능력을 향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메시지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설이 경색된 남북관계에 변화의 싹을 틔우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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