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게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미래에 우리는 어떤 집에 살게 될까. 수십 년 뒤의 먼 미래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10년쯤 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33년이면 빅데이터와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과 같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을 탑재한 신개념 스마트 주택이 등장할 것이란 과학계의 예측이 이미 실재하기 때문이다. 부산 강서구 일원, 3개의 강이 합류하는 세물머리에 위치한 이연경(32)씨의 제로에너지 주택은 우리가 머지않아 목도할 근미래의 집이다.
이씨와 남편, 두 살 아들이 사는 2층짜리 집은 얼핏 보면 일반 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이씨는 마치 보물찾기 하듯 집 안 곳곳에 숨어 있는 스마트 기술을 끄집어냈다. 외출이나 귀가 패턴을 분석해 조명이나 난방을 자동 제어하거나 음성이나 스마트폰으로 전자기기를 조정하는 흔히 알려진 기술에서부터 주택 내 헬스케어 장비를 통해 온오프 건강관리가 연계되는 최신 기술까지. 현존하는 가장 똑똑한 집에 들어간 친환경·스마트 기술은 무려 40가지다. 이씨는 "시곗바늘을 10년 앞으로 돌린 것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집이 기술을 만났을 때..."우리 집은 실험 중"
지난해 초 아파트 전세 재계약을 앞두고 있던 이씨 부부는 우연히 수자원공사의 스마트 시범도시 실증 단지 입주자 모집 공고를 접하고 미래 주택살이에 도전했다. 14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기회를 잡은 이는 이씨를 포함한 54세대. 4년 동안 임대 보증금과 임대료 없이 매월 관리비만 내고 살면서 기술을 체험하고 기술 개선이 이뤄지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실제로 사는 공간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리빙랩(Living Lab)의 일원인 셈이죠."
처음엔 어색했던 AI, 로봇과의 동거는 이제 일상이 됐다. 이씨는 거실에 설치된 거울 앞에 멈춰서 능숙하게 하루 건강관리 루틴을 선보였다. "거울인 동시에 입주민의 체중, 체지방, 혈압 등 실시간 측정 수치가 표기되는 건강 측정 시스템이에요. 이 시스템이 커뮤니티 시설에 있는 웰리스센터와 연결돼 상주 간호사가 입주민의 건강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하죠."
건강관리의 끝판왕은 인공지능 체육센터. AI 트레이너가 주민의 체형과 체력 등을 분석해 개인지도까지 해준다. 맞춤 식단을 제공하는 냉장고를 통해선 생애 주기와 생활주기에 따른 식생활을 관리받을 수 있다.
이 밖에 가정에서 발생한 쓰레기를 재활용과 폐기물로 구분해 수거하는 '슈퍼빈', 로봇카페 기술을 적용해 로봇이 음료를 만들고 서빙까지 담당하는 카페, 빗물을 재활용하는 등 친환경 재배로 신선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스마트 팜까지 집 안팎에서 리빙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기술이 가져다준 갖가지 편리함 중에서도 부부가 가장 크게 만족하는 것은 아무래도 에너지 비용이다. 단지는 전국 최초의 제로에너지 1등급 인증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모든 시설은 패시브 설계 공법으로 지어져 열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태양광과 수열, 지열 등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해 에너지 소비량의 100%를 자체 생산한다. 개별 주택에서 생산해 쓰고 남은 전기와 열을 이웃과 공유할 수도 있어 에너지 비용이 '0원'으로 수렴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가스비와 전기료 등 각종 비용이 폭발적으로 오르는 시대에 제로에너지 개념은 너무나 매력적인 가치죠."
인공적인, 그러나 인간적인 주택의 집합
이씨의 집을 품은 '부산 에코델타 스마트 빌리지(대지면적 7,202㎡, 연면적 3,619㎡)'는 국내 최초의 미래형 주거 단지다. 최신 기술로 중무장한 미래 도시에 온기를 불어넣는 설계 작업은 친환경 건축에 뚜렷한 성과를 보인 건축가 집단 '운생동' 건축사사무소가 맡았다. 장윤규 국민대교수와 함께 운생동 사무소를 이끄는 신창훈 건축가는 "건축을 하면서 자연을 점령하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기존 방식으론 더는 안정된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며 "친환경 건축 바탕 속에서 주거 공간과 마을 디자인을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한 시도"라고 소개했다.
이씨 부부와 두 살 아들이 사는 집은 1층에 거실과 주방, 2층에 방 3개가 배치된 2층 주택이다. 단열과 공기 밀폐 기능을 극대화해 적절한 실내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된 패시브하우스 공법으로 지었는데 비슷한 구조의 집 5채와 접해 하나의 '블록'을 이룬다. 단지 전체의 보안 및 관리는 중앙 관제시설이 운영하는데 이 블록 하나가 그 최소 단위인 셈이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지붕 아래로는 작은 뜰, 주차장 등 오밀조밀하게 연계된 공동 공간이 도란도란한 분위기를 만든다.
신 대표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도 친환경적인 요소를 믹스해 인간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 과제였다"며 "블록단위로 건물을 구성하면 안전이나 냉·난방 관리에 유리하고,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작은 커뮤니티로서 기능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설계 의도는 적중했다. 생소한 블록 디자인에 대해 주민 대다수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이씨 역시 "단독 주택의 장점은 충분히 누리면서 분리수거나 청소 등은 공동 주택처럼 함께 해결해 편리하고 안정적"이라며 "서로 왕래가 잦다보니 취미와 관심사에 따라 소규모 모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기도 한다"며 만족해했다. 그는 실제로도 같은 블록에 사는 이웃들과 시작한 텃밭 동아리를 계기로 홈가드닝의 세계에 입문했다가 전국 생활원예 경진대회에서 2위에 입상할 만큼 조예가 깊어졌다고 했다. "이웃들과 가볍게 시작한 일이 평생 갈 취미 생활이 됐죠. 이 모든 게 1년 사이의 변화라니 어리둥절합니다."
한 걸음 다가온 '미래 주택'
똑똑하지만 무해한 미래의 집은 이씨를 비롯한 입주민들에게 단순한 상상이 아닌 구체적 현실이다. 제로에너지를 기본 축으로 도시농업, 온실, 스마트 헬스케어 기술까지 엮어 들어간 전무후무한 주거 실험은 주민들의 반응만 놓고 보면 절반의 성공인 듯하다. 나머지 절반의 성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신 대표는 개별 기술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기술과 마을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주거 시스템 자체에 방점을 찍었다. "10년 내로 모든 공동주택에 비슷한 수준의 스마트 기술이 적용될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이니 미래의 주거가 꼭 개별 기술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건축가를 비롯한 도시 전문가, 국가와 지역 주체, 주민 간의 섬세한 조율이 이어져야 하고, 그 경험이 더 많이 축적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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