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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있어요? 남편 뭐 해요?"... 스타트업 여성 창업자들이 맞선 '사적인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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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콘텐츠 사업을 하는 제게 한 투자사 대표가 대뜸 묻더군요. '애는 낳았냐'라고. 그러더니 '애도 낳지 않고 유아교육 사업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마땅히 애 낳고 나라에 기여한 다음 이런 사업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충고하더군요. 불과 1년 전에 겪은 일입니다."
어린이 콘텐츠 큐레이션 스타트업 '딱따구리'의 유지은 대표는 2012년 창업 이후 이런 미묘한 '먼지차별'(microaggression)을 숱하게 경험했다고 털어놨다. 여성 창업자와 남성 창업자를 달리 보는, 일견 사소하지만 폄하의 뉘앙스가 담긴 일상적 차별 말이다. 쓸데없이 남편 직업을 묻거나 외모를 지적하는 일도 여전하다.
유 대표는 이처럼 여성 창업자를 '다르게 보는' 시선이 여성의 창업 활동을 제약할 뿐 아니라, 여성 창업 투자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투자 받는 단계에서도 여성 창업자는 남성 창업자와 남성 심사역이 형성한 내집단에 진입하기 쉽지 않다"면서 "여성들이 많이 창업하는 육아, 보육 서비스들도 다른 영역에 비해 사업성이나 시장 규모가 쉽게 저평가된다"고 꼬집었다.
익명을 요청한 다른 여성 스타트업 대표 A씨도 비슷한 경험을 전했다. 그는 "기업 오너급이었던 투자자가 '여자가 창업한 회사엔 아예 투자 안 한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고 떠올렸다. A씨는 "여성은 결혼과 출산 탓에 사업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며 "그래서 여성 창업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남다른 기술만 있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스타트업. 사회적 편견과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이 업계에도 성별에 따른 차별과 선입관은 과연 존재할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일보는 지난해 시리즈A(본격적인 기관투자가 시작되는 단계) 투자를 유치한 스타트업 대표의 성별을 조사했다. 1년간 시리즈A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216개 중 여성이 단독대표인 기업은 15개로, 전체의 6.9%에 불과했다. 여성과 남성이 공동대표인 기업(5개)까지 포함해도 9.2%에 그쳤다.
시리즈A의 후속 투자인 시리즈B 투자까지 받은 여성 창업자는 이보다 더 적었다. 지난해 1년간 시리즈B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은 모두 97개였는데, 이 중 여성이 단독 대표인 기업은 3개(3.1%)뿐이다. 여성과 남성이 공동대표인 곳을 합쳐도 5개(5.1%)에 머물렀다.
여성 창업자들은 벤처투자업계에 자리 잡고 있는 남성 중심 문화가 여성 창업자에게 불리한 투자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말한다. 여러 차례 기관투자를 유치한 경험이 있는 한 여성 스타트업 대표 B씨는 "시리즈C·D·E까지 가면 사실 성별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숫자(매출, 이익 등)와 시장만 보게 된다"라면서도 "그러나 시리즈A·B 단계에선 관계와 신뢰가 투자 기회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그는 "초기 투자 단계에서 여성들은 기존 네트워크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남성에 비해 적은 기회를 얻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투자심사역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여성 스타트업 대표 C씨도 "투자업계에서 의사결정권자들은 대부분 남성"이라면서 "특히 투자 규모가 커지거나, 펀드를 결성하는 단계에서는 골프, 술 등의 접대 문화가 끼어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 심사역도 느린 속도긴 하지만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창업투자회사 인력 현황을 조사한 2017년 전체 투자심사인력 953명 중 여성 심사역은 87명(9.2%)이었으나, 2021년엔 1,415명 중 193명(13.6%)으로 비중이 늘었다. 본보 자체 조사 결과, 지난해엔 여성 비율이 14.0%(1,443명 중 202명)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전체 224개 창업투자회사 중 절반이 넘는 122개 투자사는 여성 심사역을 아예 두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늘어난 여성 심사역은 투자업계에 막 진입한 신참급이어서 아직은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다. 여성 스타트업 대표 D씨는 "현재까지 투자사 대상으로 100여 차례 투자설명회를 진행했는데, 여성 심사역을 만난 적은 10% 이내였던 것 같다"면서 "해외 투자설명회에 가면 그래도 여성 심사역이 20, 30%는 됐다"고 귀띔했다. 여성 대표 A씨나 B씨도 '투자 결정 과정에 참여한 여성 심사역을 만난 적 있느냐'는 질문에 "본 적 없다"고 답했다.
물론 투자를 유치한 여성 창업자가 적은 이유에는 '편견'이나 '차별' 이외의 요소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창업을 하는 여성 자체가 적을 수도,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이 성공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해 시리즈B 투자를 유치한 돌봄·교육 매칭 플랫폼 '자란다'의 장서정 대표는 "한국은 이공계열을 전공한 여성이 절대적으로 적어 (벤처투자가 상대적으로 집중되는) 기술 기반 창업도 부족하다"면서 "창업 후에도 고급 개발자 등 기술 인력을 영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쉽다"고 분석했다.
여성 스타트업 대표 C씨는 여성 창업자가 공정하게 평가받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다소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여성 심사역의 수 자체가 늘고 이들이 조직에서 결정 권한이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면, 여성 창업자에게 더 많은 기회의 문이 열릴 거라는 얘기다. C씨는 "여성 심사역이 늘면 남성 창업가의 성공 방정식만 높게 평가 받는 지금보다는 더 균형 있는 투자 심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성 중심 스타트업 커뮤니티 '스여일삶'(스타트업 여성들의 일과 삶)의 김지영 대표 역시 "여성 창업자들은 여성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남성 투자자로부터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가 어렵고 투자 유치에 실패하기도 한다"면서 "아직까지 여성 심사역 비중이 적긴 하지만, 증가하고 있는 것은 의미가 큰 변화"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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