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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유럽 남자아이들은 왜 드레스를 입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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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아래 그림은 반 다이크의 1637년 작 '찰스 1세의 다섯 아이들'이다. 찰스 1세는 1625년부터 1649년 처형될 때까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었다. 그의 아홉 아이들 중, 궁정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시점까지 태어나 살아 있던 다섯 아이를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자, 퀴즈다. 이 그림 속에는 몇 명의 왕자와 몇 명의 공주가 있을까?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아이가 왕자인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바지를 입었기 때문이다. 정면을 과감하게 바라보며 큰 개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포즈로 보아 왕위를 계승할 맏이 왕자인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도상학에서 그림 속의 개는 정절, 충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바로 왕정 복고 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다. 1630년생으로 당시 7살이었다. 한편, 맨 오른쪽의 아기는 성별을 알아보기 힘든 차림이다. 왕가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 않은 것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임을 의미한다. 이 아기는 1637년에 태어난 앤 공주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 명은 전부 공주일까?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에? 아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아이는 왕자다.
옛날 유럽 아동들은 어릴 때에는 모두 드레스를 입었기에 바지 착용 여부로는 그림 속 어린 아이들의 성별을 구분할 수 없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빨간색 등 색깔이 진한 천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남자아이, 하늘색 등 연한 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면 여자아이다. 진주 목걸이를 하고 목 둘레를 어깨와 가슴 쪽까지 더 깊게 판 드레스를 입은 쪽이 여아다. 남아는 목걸이를 해도 붉은 산호로 만든 제품을 착용한다. 그림 속 소품으로 구별할 수도 있다. 인형을 들고 있으면 여아, 총과 칼 등 무기류나 채찍, 목마와 같이 그려져 있으면 남아다.
위의 그림을 다시 보자. 같은 드레스 차림이어도 왼쪽에서 두 번째 아이의 차림새는 다른 두 공주와 약간 다르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진주 목걸이를 하지 않은 이 아이는 제임스 왕자, 형인 찰스 2세에 이어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제임스 2세다. 1633년생으로 당시 4세.
유럽에서는 중세까지 복장에 연령 구분이 없었다. 계급 구분만 엄격했다. 아기는 배냇가운을 벗자마자 같은 신분의 성인 남녀처럼 옷을 입었다. 성인 의복은 로마 시대부터 입던 '튜니카'를 계승한 '튜닉'이라는 반팔 원피스 형태의 옷이 기본이었다. 튜닉은 치마 겸 긴 웃옷의 형태였기에 상의와 하의의 구분도 확실하지 않았다. 여성과 연장자는 치마를 보다 길게 입은 정도가 복장으로 알 수 있는 성별 연령별 차이였다. 아직 본격적인 바지 형태의 옷은 존재하지 않았다.
13세기경,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타이츠같이 생긴 옷인 '호스(hose)'가 등장한다. 호스는 지금의 바지와 달리 양쪽 다리가 분리돼 있어서 끈이나 단추로 고정해야 했다. 가운데 터진 부분은 긴 외투나 튜닉을 입었기에 자연스레 가려졌다. 그러다 짧은 외투가 유행하자 호스 두 벌 사이에 '코드피스'라 불리는 천을 덧대어 성기가 노출되지 않게 했다. 남성들은 코드피스를 부풀리는 경쟁을 하기도 했다.
노인들은 짧은 외투와 부풀린 코드피스라는 젊은 남성들의 옷차림을 해괴망측하게 여겼다. 그들은 유행과 상관없이 긴 외투를 입었다. 존경할 만한 지위에 있거나 권위를 가진 남성 노인들이 이렇듯 긴치마를 입는 관습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진다. 법관이나 성직자의 가운을 예로 들 수 있다.
호스라는 바지가 등장했어도 유럽의 남자아이들은 계속 긴치마를 입었다. 여러 개의 끈이나 단추로 양쪽 다리와 코드피스를 고정해서 입어야 하는 호스는 어린아이가 혼자 입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배변 훈련이 제대로 되기 전까지 아이들은 주로 배냇가운 형태의 옷을 입기 마련이다. 일본에서도 하카마(袴)는 다섯 살부터 입었다. 게다가 당시는 집에서 옷을 지어 입는 시대였기에 성장이 빠른 아이들에게 재단이 복잡하고 딱 맞는 옷을 자주 바느질해서 입히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남아도 여아처럼 치마를 입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야 호스를 입었던 것이다.
17세기 들어 이탈리아에서 판탈롱이 개발되었다. 판탈롱은 영어로 '팬츠'라고 부르는 지금의 서양복 바지 형태의 옷이다. 입고 벗기가 호스보다 편했기에 농민이나 병사, 기술자들은 실용적인 판탈롱을 입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반바지인 브리치스(퀼로트)를 입었다. 긴바지인 판탈롱은 하층 계급의 일복으로 여겨 입지 않았다. 이 반바지 역시 호스처럼 몸에 붙고 단추나 매듭을 사용하기에 아동이 혼자 입기 어려웠다. 그래서 귀족 집안 남아들은 여전히 드레스를 입다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바지를 입었다. 보통 그 나이는 일곱 살 무렵이다. 앞서 그림 '찰스 1세의 다섯 아이들'에서 일곱 살인 찰스 2세는 바지를 입고 있는데 네 살인 제임스 2세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유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이제 귀족들의 반바지(퀼로트)를 입지 않고 앙시앵레짐을 타파한 혁명군의 긴바지(상퀼로트, 판탈롱)를 입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복장이 되었다. 이리하여 긴바지는 성인 남성의 기본 복식이 된다. 한편 반바지는 살아남아 아동복이 되었다. 16세기경부터 아이들에게 구식 복장을 아동복으로 입혔기 때문이다. 아기들이 쓰고 있는 배냇모자는 13세기까지는 성인 남성들이 일할 때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썼던 머리쓰개였던 사실이 한 예다. 마찬가지로 성인 남성복으로는 타파되었던 반바지(퀼로트) 역시 긴치마 다음 단계에 입는 남자 아동복이 되었다.
물론 어려서부터 일을 해야 했던 가난한 집안의 남자아이들은 이런 반바지 단계 없이 바로 긴바지를 입었다. 반바지를 예복으로 입던 남자아이들은 상류층에 속했다. 반면 여아에게는 아동복이 없었다. 바로 성인 여성처럼 드레스를 입었다. 말하자면, 상류층 남자아이들만 성인기가 유예된 특수한 아동기를 보낸 것이다. 이들은 바지 착복식인 '브리칭(Breeching)'이란 의식을 6세에서 8세 정도에 하고 긴바지를 입은 후에야 진짜 남성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동화책 삽화나 드라마, 영화에 등장하는 어린 귀족 도련님은 반바지를 입고 있다.
상류층 남아들이 드레스를 입다가 반바지를 거쳐 긴바지를 입는 관습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지속되다 1차 세계대전 후에야 사라졌다. 현재는 영국 등에서 남아에게 10세경까지 반바지 교복을 입히는 경우만 남았다. 갓난아기에게 성 구분 없이 긴 드레스 형태의 가운을 입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역사책을 읽다 보면 반바지 입기와 '브리칭'에 대해 재밌는 기록이 꽤 많다. 긴바지를 갓 입은 남아는 치마나 반바지를 입은 남아들을 놀리고 으스댔다고 한다. 이에 치마나 반바지를 입은 남아들은 자신의 복장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빨리 브리칭을 하고 싶어 했다. 프랑스의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에 의하면 "어린 소년들은 여자용 복장을 하고 있는 한 아직 아기라고 여겨졌기('아동의 탄생'에서 인용)" 때문이었다.
흥미롭다. 드레스 입는 아기에서 반바지 입는 예비 남성, 긴바지를 입는 진짜 남성까지 차곡차곡 남성 사회의 서열이 매겨져 이에 따르는 과정을 통해 여성화된 차림새를 하고 있는 남성은 하급 남성으로 여기고 놀리는 사고방식이라니! 여자와 아이는 자격이 모자란 인간으로 여기는 우리나라의 '아녀자(兒女子)'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남아는 아동복이 있지만 여아는 바로 성인복을 입는 이유는 여자는 영원한 2등 인간이기에 유예기간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본인이 바지를 입은 뒤 바지를 입지 않은 남아들을 놀리고 괴롭혔다는 기록을 보면, 현재 사춘기 남성들이나 나이 들어도 덜 성숙한 남성들 중에 여성과 여성적인 남성, 남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선동해 본인의 남성다움을 또래 남성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그릇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떠오른다.
바지 입은 것을 대단하게 추어주고, 바지 입은 자에게 바지 입지 않은 자를 괴롭힐 권력을 주는 것, 사실 이것이 바로 가부장제가 돌아가는 패턴이다. 권력을 쥔 상층 남성에게 반발하지 못하도록 일반 남성에게 여성과 더 어린 남성을 지배할 권력을 나눠주는 것 말이다. 그래서 여자가 바지를 즐겨 입으면 여자답지 못하다고, 예의가 아니라고, 페미니스트라고 공격하는 것이다. 바지 입지 않은 자를 차별할 바지 권력을 잃을까 봐 두렵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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