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이 사라졌다] 명진탕 김 사장의 화양연화
서울 은평구 불광역 인근 대조시장의 끝자락. 여기엔 아직 과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명진목욕탕이 있다.
탈의실로 들어가면 △대형 거울·이발용 의자를 구비한 구내이발소 △열쇠를 돌려 잠그는 황갈색 합판 옷장(라커) △양말을 신고 벗을 때 잠시 몸을 의지하는 나무 평상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어 △단골손님의 치약 칫솔 면도기 따위를 보관하는 작은 사물함 옆에 △강한 아저씨 냄새를 솔솔 풍기는 대용량 스킨병과 △덜그럭 소리를 내는 두툼한 체중계가 보인다.
스포츠·레저 시설에 딸린 목욕탕이나 대형 찜질방과 달리, 오로지 '목욕' 기능에 충실한 동네 목욕탕. 낯익은 소품, 그 특유의 냄새,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반바지 차림의 목욕관리사(세신사)와 이발사는 잊고 살던 기억을 곧바로 소환하는 장치다. 부모님 따라 주말마다 목욕탕에 가던 세대에겐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고, 이런 형태 목욕탕을 가본 적 없는 젊은 세대가 보기엔 굳이 찾을 일 없는 낡고 불편한 곳이 여기다.
이용객에게 '추억의 공간'인 이곳은, 주인 김문권(69)씨에게는 젊은 시절 꾸었던 꿈을 이루게 해 준 '성취의 공간'이다.
"제 고향엔 목욕탕이 없었어요. 시골 산골이었는데 목욕탕이 다 뭐예요, 냇가에서 멱 감거나, 설 명절에 가마솥에 물 데워서 한 번씩 씻었지. 목욕탕 처음 간 건 서울에 와서였어요."
전남 장성군 산골 마을에서 자란 김씨는 제대 직후 상경했다. "학교는 못 다니고 시골에서 부모님 농사일 거드는데 이게 안 맞는 거라. 그거 가지고는 돈도 못 벌겠고. 서울 갈란다 하고 무작정 올라왔죠." 그래서 닿은 곳이 청계천이었다. 1970년대 청계천엔 비슷한 이유로 상경한 청춘들이 많았다. 배운 기술이 없으니, 몸 쓰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미원이나 아이스크림을 배달했고, 스물여섯 되던 1980년 작은 구멍가게를 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가장이 된 김씨의 꿈은 따로 있었다. 번듯한 목욕탕의 사장님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목욕탕은 정부에서 허가를 받을 정도(1980년대까지 목욕탕은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로 뒷배가 있거나, 지하수가 풍부한 지반을 탐사해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재력가들이나 하는 사업이었다.
그래도 꿈은 버리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과 목욕탕을 찾으며 "언젠가는 나도"라는 생각에 목욕탕 구조를 유심히 살폈다. 드디어 2002년, 꿈은 이뤄졌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목욕탕을 인수했고, 청계천에서 다림질을 하던 이은용(61)씨를 꼬드겨 세신사 겸 남탕 관리인으로 앉혔다. 김씨는 그를 "순박하고 믿을 만한 친구"라고 평했다. 둘은 기존 목욕탕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구조에서부터 타일 하나까지 두 사람 손이 안 간 곳이 없었다.
개업은 성공적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목욕탕의 전성시대였다. 외환위기 영향도 크게 받지 않는 업종이었다. 전국 목욕탕 수는 2003년 약 1만 곳에 육박하며 업황이 절정에 달했다.
당시만 해도 명진목욕탕은 대조동 일대에서 최신식이었고 규모도 가장 컸다. 평일 100명 이상, 일요일 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김씨의 목욕탕을 찾았다. 세신사 이씨는 "때 밀러 오는 사람이 20명이 넘어 끼니를 걸러야 했을 정도"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김씨의 두 아들은 등록금 비싼 공대에서 대학원까지 졸업, 굴지의 대기업에 취업했다. 목욕탕 인기도 김씨의 인생도 황금기였다. "좋았지, 좋았지." 그때를 떠올리는 김씨 얼굴엔 흐뭇함이 묻어났다.
"내 나름대로는 여기에 올인을 한 거죠. 그런데 막차를 탄 게 됐어요."
위기는 시나브로 찾아왔다. 동네 곳곳에 피트니스 센터가 들어섰다. 거기선 목욕탕·사우나가 무료였다. 가족과 함께 대중탕을 찾는 집이 하나둘 줄었고, 목욕탕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생겨났다. 경쟁자였던 동네 목욕탕들은 연이어 사라졌다. 2010년 은광탕이, 이듬해 삼광탕이 문을 닫았고, 2020년 동명목욕탕마저 영업을 종료했다. 현재 인구 2만6,000명 대조동에 남은 목욕탕은 김씨네가 유일하다.
코로나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감염 공포 속에서 정부와 언론은 목욕탕을 '바이러스 배양소'인 양 매도했다. 단골인 노령층은 감염 우려에 목욕탕을 찾을 엄두도 못 냈고, 가족 단위 손님도 발길이 끊겼다. 서로를 알몸으로 대해야 하는 목욕탕에, '비대면 시대'란 변화는 너무 가혹했다.
동네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명진목욕탕도 팬데믹을 피해 갈 순 없었다. 김씨는 몸서리치며 그때를 떠올렸다. "포기하는 심정이었죠. 매출이 형편없었어요. 소상공인 보상을 받았지만, 그 정도로 될 일이 아니었거든요."
최근에는 조금 나아졌다지만 손님은 여전히 코로나 이전의 절반에 못 미친다. 김씨는 "여기가 내 집이어서 나갈 수도 없고, 목욕탕은 어쩔 수 없으니 운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기엔 아직도 그는 열심이다. 매일 오전 3시 30분에 일어나 보일러를 점검하고 탕에 물을 받는다. 여전히 5시에 문을 연다. 새벽 손님 사라진 지 오래라지만 늦게 여는 목욕탕은 동네 목욕탕이라 할 수 없기에 그렇다. 손님이 없어도 목욕물은 데워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상도 얼마 남지 않았다. 목욕탕 바로 앞 동네가 모두 헐렸다. 2026년 2,000가구가 넘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단다. 아파트 단지엔 목욕탕, 사우나 시설을 갖춘 종합 레저센터가 예정됐다. 코로나도 버텼지만, 김씨는 여기가 끝임을 느꼈다. 레저센터와 겨루기엔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다. 2년 안에 목욕탕을 접을 계획이다.
목욕탕 주인 김씨는 "목욕탕의 시대가 끝났다"고 했다. 단골손님들이 나이를 먹어 지팡이를 짚고 오더니, 요즘에는 통 안 보인다고 말했다. 탕 안에서 시끌벅적 떠들던 꼬마 손님들도 못 본 지 오래다.
"정부에서 목욕탕을 좀 지원해주면 어떨까요?" 이렇게 물었더니, 그의 답은 의외였다.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거든. 시대가 저문 거야. 그 흐름을 가로막고 살 수 없는 거죠. 목욕탕이 다시 잘되면 정말 좋겠지. 하지만 아쉬워도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대중목욕탕 시대는 그렇게 저물고 있다.
▶'목욕탕이 사라졌다' 몰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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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청계천 배달하며 품었던 목욕탕의 꿈, 이제 놓아주려 합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1116070002790
②목욕업 최전성기는 2003년... 통계로 본 대중탕 흥망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1115240002597
③망해도 폐업 못하는 목욕탕의 속사정… "철거비만 수천만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1611240004703
④때 밀어 떼돈 벌던 시절이 있었다... 영광의 세월 지나온 세신사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1611170002245
⑤공중위생 덕에 흥한 목욕탕 '팬데믹 위생' 탓에 사라진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11617130001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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