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땐 물도 안 마셔요"... 있어도 못 쓰는 '장애인 화장실'

입력
2023.01.10 04:30
8면

화장실 불편도 장애인 이동권 가로막아
건물 화장실 절반이 사용금지·창고 활용
지자체, 시설만 마련하고 운영 실태 외면

휠체어를 탄 장애인 김강민씨가 8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인근 빌딩의 장애인 화장실을 찾아 열림 버튼을 눌렀지만 출입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서현 기자

휠체어를 탄 장애인 김강민씨가 8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인근 빌딩의 장애인 화장실을 찾아 열림 버튼을 눌렀지만 출입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서현 기자

“여기도 안 되겠네요.”

8일 오후 1시, 휠체어를 탄 김강민(21)씨가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 한 상가의 장애인 화장실 앞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화장실 열림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출입문은 열리지 않았다. 옆 건물 지하 2층 장애인 화장실로 가봤지만, 역시 잠금장치가 돼 있었다. 그와 함께 1시간 동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8번째 건물에서야 사용 가능한 화장실을 찾을 수 있었다. 김씨는 “외출할 때 화장실 하나 찾는 것도 이렇게 막막함의 연속”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대중교통'이 장애인 이동권 전부 아냐

새해 들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이동권 보장’을 이유로 지하철 시위를 재개하자 찬반 논쟁도 다시 불붙고 있다. 흔히 이동권 하면 대중교통을 떠올리기 쉽지만 장애인에게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외부 화장실을 맘대로 이용할 수 없다면 외출을 삼갈 수밖에 없는 탓이다. 이동권을 보장하려면 편의시설에 대한 접근성도 반드시 구비돼야 한다는 뜻이다.

취재진은 5, 8일 김씨 및 장애인이동권증진 협동조합 콘텐츠 ‘무의’ 활동가들과 함께 유동 인구가 많은 용산역과 서대문역, 강남역 인근 건물 등 서울 48곳의 장애인 화장실을 점검했다. 결과는 낙제점이었다. 12곳은 출입이 아예 불가능했고, 3곳은 뚜렷한 이유 없이 사용금지 안내문이 부착돼 있었다. 창고로 활용되거나(3곳), 시설 미비로 이용이 어려운 곳(4곳)까지 합쳐 절반에 가까운 22곳의 장애인 화장실이 ‘있으나 마나’였다. 이영지 무의 활동가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어 밖에 나오면 되도록 물조차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5일 서울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인근 건물의 장애인 화장실. 대변기에 종이 박스를 올려놔 사용을 막고 있다. 이서현 기자

5일 서울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인근 건물의 장애인 화장실. 대변기에 종이 박스를 올려놔 사용을 막고 있다. 이서현 기자

법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장애인의 화장실 이용권은 25년 전 일찌감치 보장됐다. 장애인노인임산부등의편의증진보장에관한법률(장애인등편의법)에 따라 1998년 이후 지어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청사, 공공건물, 공연장이나 전시장, 1,000㎡ 이상의 판매시설, 500㎡의 종교시설 등에는 장애인 화장실(대변기)을 의무 설치해야 한다. 5년마다 정부와 지자체가 의무설치 대상을 전수 조사하는 규정도 마련돼 있다.

그러나 ‘디테일’이 떨어지는 게 문제였다. 전수 조사는 기준 충족 여부만 살핀다. 장애인 화장실의 유효폭이나 바닥면 크기 등만 확인할 뿐, 사용자가 실제 시설을 제대로 쓸 수 있는지 검증하는 별도 조항이 없는 탓에 ‘무늬만 화장실’이 넘쳐나고 있다.

장애인 화장실 운영 현황. 그래픽=신동준 기자

장애인 화장실 운영 현황. 그래픽=신동준 기자

서대문역 인근 부동산과 식당이 입점한 건물 1층에 있는 장애인 화장실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관리인 연락처도 따로 표시돼 있지 않았다. 10분 넘게 기다려 만난 건물관리자는 “외부인이 와서 쓰레기를 버리거나 더럽게 사용할 때가 많아 막아 놓는 것”이라며 “장애인이 요청하면 열어줄 수 있다”고 했다. 신용산역 2번 출구에서 200m 떨어진 한 건물의 장애인 화장실은 대변기에 종이 박스를 올린 뒤 박스를 내릴 수 없도록 테이프로 칭칭 감아놓기도 했다.

출입은 가능했지만 용변을 해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도 많았다. 이촌역에서 신용산역 사이에 있는 한 건물의 1층 장애인 화장실은 비품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청소기부터 온풍기, 의자 등 각종 잡동사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화장실 내부 잠금장치가 망가지거나 없어 정상 사용이 어려운 화장실도 4곳이나 됐다.

장애인 화장실 운영 기준 마련 시급

화장실을 창고로 쓰고 있는 서울지하철 4호선 이촌역 인근 장애인 화장실. 이서현 기자

화장실을 창고로 쓰고 있는 서울지하철 4호선 이촌역 인근 장애인 화장실. 이서현 기자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은 대체 화장실을 찾는 과정도 비장애인에 비해 훨씬 버겁다. 김씨만 해도 옆 건물로 이동할 때 턱이 높은 곳을 피해 돌아가느라 10초면 너끈할 거리가 2분 넘게 걸렸다. 장애인 화장실이 애초에 개방을 전제로 설치돼야 하는 이유다. 조한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외부인이나 노숙인이 더럽힌다고 장애인 화장실을 잠가 놓는 건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격’”이라며 “장애인등편의법의 개정 취지에도 반한다”고 지적했다.

이제라도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 장애인 화장실에 대한 최소한의 운영ㆍ관리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홍윤희 무의 이사장은 “화장실 이용은 이동권과 더불어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되는 기본권”이라며 “우리 사회의 장애인 화장실 실태를 전반적으로 짚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서현 기자
나주예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