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나라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약 4천 종의 식물이 자랍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풀, 꽃, 나무 이름들에 얽힌 사연과 기록, 연구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엮을 계획입니다.
나비 박사 석주명과 식물학자 장형두의 죽음, 그리고 식물학자 도봉섭의 납북 등 우리는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의 혼란기 동안 여러 명의 자연과학자들을 의문의 죽음이나 고문치사, 정치적 소신과 무관한 납북 등으로 잃었다. 그중 최근 알려진 식물학자 도봉섭과 그의 부인 화가 정찬영의 수수께끼 같은 사연을 풀어 보았다.
도봉섭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국내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식물학자다. 우리나라 식물 이름을 한글로 처음 정리하여 표준화한 '조선식물향명집(1937)' 편찬에 참여했고, 조선생물학회(1945)와 조선약학회(1948)의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부인 정찬영은 나혜석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활동했던 몇 안 되는 여성 화가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조선미전에서 여러 번 입선하며 촉망받던 화가였지만 전해진 작품이 많지 않아 최근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야 후손들의 작품 기증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절필시대(2019)' 등을 통해 재조명된 바 있다.
정찬영의 작품 중에 1935년 조선미전의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소녀'라는 작품이 있다. 그녀의 작품 중 유일한 인물화여서 나는 자화상으로 직감했다. 그림 속 초점을 잃은 소녀의 시선과 비어 있는 나물 바구니에서 서러움이 느껴진다. '일폭 채화에서 조선의 정조와 분위기를 볼 수 있고, 조선의 봄을 볼 수 있다'는 당시 평단의 상찬은 그림의 분위기 일부만 반영한 표현인 듯하다.
소녀의 치맛자락 언저리에는 할미꽃이 그려져 있다. 왜 할미꽃을 그린 것일까? 기록에 따르면, 부부는 회기동에 직접 집을 짓고 수많은 식물들로 정원을 가꾸었다고 한다. 당연히 부부의 정원에는 할미꽃도 자랐을 것이다. 할미꽃을 그린 것은 조선의 봄을 알리고자 화가 스스로 정했을 일이겠지만 Pulsatilla koreana라는 학명을 가진 조선 특산의 할미꽃을 식물학자 남편이 알려주지 않았겠는가?
최근 꽃과 나무를 그린 정찬영의 식물 세밀화들이 공개되면서 그녀의 그림이 도봉섭이 저술한 도감 '조선식물도설(1948, 금룡도서)'에 활용된 것이 확인됐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국내 식물학계 태두였던 정태현이 한글 식물도감의 공동저술을 이들 부부에게 제안했던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감 제작이 한창이었을 즈음 시작된 한국전쟁과 도봉섭의 납북으로 공동 작업은 중단됐다. 휴전 이후 정찬영은 전쟁 중에도 어렵게 간직했던 남편의 원고와 자신의 그림들을 도감저술을 위해 제공했지만 '한국식물도감(1956, 신지사)'은 정태현의 단독저서로 발행된다. 사례마저 없었다는 점은 요즘엔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납북 이후에도 도봉섭은 '식물도감(1988, 평양과학출판사)'을 저술하는 등 식물 연구를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도감에도 과거 편찬에 참여했던 '조선식물향명집'의 식물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현재 남북이 같은 식물 이름을 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새겨볼 일이다. 또 하나의 놀랍고 새로운 사실은 그의 식물도감 특정 식물 그림들이 부인 정찬영의 그림과 똑같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할미꽃과 나팔꽃 그림이다. 이념과 체제 갈등이 심한 시기에 남한의 식물도감 그림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결정이었겠는가? 부인의 작품 '소녀' 속에 그려진 할미꽃처럼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리움의 심경을 감추어 둔 코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아린 흔적들이지만 언젠가 이들 부부의 사연이 봄볕의 할미꽃처럼 피어나 회자될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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