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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하는 남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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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새해가 밝았다.
지나간 해는 어떠하였나 반추하고 다가올 새해는 어떻게 보낼까 계획하기 좋은 시기다. MBTI 끝자리 J유형으로 계획 세우는 게 취미인 나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짤막하게 돌아보면, 지난해에는 부단히 남자 청소년과 청년을 만났다. 정치권에서 청년 남성의 요구를 빌미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비롯하여 무책임한 반페미니즘, 여성혐오 메시지를 쏟아냈고 이러한 말들이 공명하여 교육 현장에도 울려 퍼졌기에 더 바삐 자리를 만들어야만 했다. 막상 현장에서 만난 많은 이들은 온라인에서 보듯, 또 누군가 기대하고 염려하듯 혐오로 똘똘 뭉쳐 있는 그런 납작한 존재만은 아니었다. 대부분 제 각각의 환경과 그 안에서의 경험, 사고, 정념이 다양하게 발산되는 그런 입체적인 모습이다. 다만 한 가지 그 다양한 모습을 꿰뚫는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과 만나기 위해 무관심을 뛰어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고 했던가. 강의활동 초반, 힘든 교육을 떠올릴 때면 교육 내용에 저항하며 인터넷에서 본 가짜 뉴스를 쏟아내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막상 지금은 부정적 의견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아무런 의견 없이 천진하게 침묵하는 모습이 가장 어렵고 두렵다.
최근 한 학교에서 성별 분리 수업으로 남자반 수업을 진행했다. 나름 교육을 잘했다 생각하여 뿌듯하게 다른 반 선생님들과 소회를 나눴는데, 여자 청소년 반에서 진행한 결과물을 보고 주눅이 들었다. 각양각색의 필기구로 꾸민 결과물이 화려하기도 했지만, 딱 봐도 엄청나게 알찬 이야기들이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육을 하며 청소년들에게서 나온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참여자의 관심사나 이해도 측면에서 비교불가였다. 특히나 성별에 따른 학습 태도에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은 많은 선생님의 공통된 경험이었다. 나이도 또래에 같은 교육 내용을 두고도 이런 차이가 발생하곤 한다. 단지 우연의 연속이거나 그저 편견일 뿐일까? 어떤 이들은 청소년기 성별에 따라 다른 성장 속도를 이유로 꼽기도 하는데 단지 그뿐일까? 나는 여성 참여자들의 결과물이 더 그럴싸한 것이 단지 그 청소년들의 미감이나 발육, 생물학적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애초 참여 활동에 임하는 이들의 태도가 너무 다르다. 바로 남성 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체념과 냉소다.
얼마 전 '이대남' 담론이 뜨거웠을 때,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가 화제였다. 이 조사에 따르면, 청년 남성 대다수는 여성-남성 간 임금 격차만이 아니라 고졸자-대졸자 간, 명문대-비명문대 출신 간 임금 격차에 높은 비율로 공정하다고 응답했다. 그뿐만 아니라, 환경문제와 관련한 의견에서도 다른 성별, 세대군과 달리 유난히 "환경보다 개발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높은 동의를 보이고,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과 '성평등 정책 강화'에 대해서는 더 높은 반대를 보인다. 위 조사 기획팀에서도 우려했듯, 이 단편적인 자료만으로 남성 청년 전체를 어떤 모습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자료에서도 남성 청년 중 적지 않은 이들에게 기존의 능력주의 같이 현재 작용하는 권력에는 체념하고,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에는 냉소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책 '대한민국 넷페미사'에서 권김현영은 문화 비평가 폴 코리건이 개념화 한 남성들의 하위문화 '두잉 낫싱(Doing Nothing·아무것도 하지 않기)'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설명에 따르면 두잉 낫싱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기다. 계급이동이 좌절된 하층계급 남성들이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을 얻거나 돈을 벌기 위해 애써 노력하지 않고 그저 실없는 소리나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나는 한편으로 위 체념과 냉소로 일관하는 남성들의 행동과 태도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이 남성들은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하고 있다.
일례로, 학교에서 교육을 하다 보면 피하고 싶지만 꼭 만나게 되는 유형의 참여자가 있다. 내 나름대로 '어그로꾼'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는데, 여기서 '어그로'는 게임용어에서 비롯된 말로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하게끔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어그로꾼은 수업 때 교육자 또는 다른 참여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혐오표현을 쓰거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저는 차별 안했는데요!"라는 식의 딴지를 걸고 웃기려 하는 등 교육을 방해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자신이 학교에서 학업성적이나 학습태도로 선생님의 인정을 받거나 운동, 싸움실력, 외모 같은 요소로 주변인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방식으로라도 관심을 획득하고자 한다.
이들의 사정을 왜 그렇게 잘 아냐면, 학교에서 많이 보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 역시 그런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런 모습이 남성 청소년에게서 더 많이 드러나는 것은 남성연대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필두로 피라미드 형식의 공고한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위계질서에서 추락하는 것은 곧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어떻게든 그 피라미드에 올라타려 발버둥 친다. 그 발버둥의 일환으로 힘을 기르거나 좋은 성적을 얻거나 부를 과시하는 방식과 더불어 폭력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있다. 이때, 외부로 향하는 폭력성을 갖추지 못할 경우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자기파괴적인 모습으로 스스로의 빈약한 자아를 부풀린다. 스스로를 패배자, 루저, 아싸(아웃사이더)로 칭하며 잃을 것 없음을 과시하고 군집하여 서로 자조하는 놀이문화를 만들어낸다. 나와 친구들은 그때 당시 서로의 불행을 겨루고 거기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함을 우습게 여기며 더 과감하고 무모할수록 '상남자'라 칭송했다. 미래를 계획하거나 학업에 심취하는 것은 유치하고 쿨하지 못한, 찌질한 모습으로 치부됐다.
한번 이 문화에 포섭되면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이미 불행 공동체가 된 서로가 비극으로 똘똘 뭉쳐 벗어날 수 없게끔 서로를 감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냉소와 체념이라는 것의 중독성이 강력해서 말 그대로, 포기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생망'(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어)을 입버릇 삼아 그 안온한 체념의 세계에 살았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희망이나 변화를 말할라치면, 냉소로 일갈했다. 그건 괜히 변화를 기대했다가 또다시 실패하여 좌절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내미는 이빨 같은 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이 남성들의 냉소와 자조는 한편으로 더 절박하지 않을 수 있는 특권에 기대어 있다는 점에서 기만적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돌봄을 요청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안타깝지만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했는데 천사 같은 누군가가 등장해서 자신을 돌보고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구원 서사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고 스스로를 그 주인공에 놓는 건 자의식 과잉일 뿐이다. 우리는 먼저 스스로를 돌보고(좀 씻고) 타인을 돌보고 돌봄 받는 것의 가치와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나약함의 반증이거나 낯부끄럽고 간지러운 일이 아니며 도리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그리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인류 문명 시작의 증거로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를 꼽았다. 고양이보다 느리고 원숭이보다 약한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생존해서 문명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누군가가 다치고 약해졌을 때 서로를 돌보는 마음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번영과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공허함을 느끼다가도 가장 취약할 때 받는 호의와 돌봄이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우리는 돌봄이 있기에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다.
너무 거창했다면, 다시 새해 인사로 돌아가자.
인류 문명의 시작까지는 몰라도 새해를 잘 보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다부지게 결의하는 것보다 그 마음 안에 담긴 절박함을 잘 살펴서 스스로를, 또 사랑하는 주변인들을 돌보는 데 쓰면 좋겠다. 이를테면 나는 올해 꼭 요리를 배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도 냉소를 녹일 돌봄의 온기가 가득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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