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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판소리 공연에서 들은 최고의 덕담

입력
2023.01.04 22:00
27면
국립극장 송년판소리 '안숙선의 만정제 춘향가'. ⓒ편성준

국립극장 송년판소리 '안숙선의 만정제 춘향가'. ⓒ편성준

아내는 2022년 12월 31일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국립창극단의 송년 판소리 공연 '안숙선의 만정제 춘향가' 무대를 예매했다. 1인당 3만 원이라 그리 비싸지 않은 데다가 안숙선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춘향가를 나누어 부르고 중간중간 짧은 토크도 곁들인 무대라 네 시간의 러닝 타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만정제 춘향가는 안숙선의 스승 김소희 명창의 호 '만정'에서 따 온 춘향가의 한 유파다).

오리정 동림숲에서의 이별 대목을 부르는 안숙선 선생의 유연함과 카리스마는 대단했고 박자희, 서정금, 유수정, 박민정, 이선희 명창 등 제자들의 소리도 각자의 개성대로 뛰어났는데 그들이 힘을 잃지 않고 무대 위에서 계속 빛나게 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고수의 장단과 추임새였다. 아시다시피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 딱 두 사람이 마당에서 펼치는 미니멀한 공연이니 두 사람의 합이 중요한 것이야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날 국립극장 하늘극장에 나선 두 사람의 고수 중에서도 특히 김청만 고수는 절대로 서두르는 일이 없이 소리꾼의 상황과 컨디션에 맞춰 진심으로 북을 치고 추임새를 넣었다.

고수의 추임새를 새겨들어보면 부정적인 내용이라고는 전혀 없이 "얼씨구" "그렇지" "좋다" "잘한다"처럼 소리꾼이 풀어놓는 대목에 감탄하고 동의하는 말들이다. 그런 태도와 제스처가 있기에 소리 하는 사람도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세상사도 이처럼 칭찬이나 격려가 있을 때 더 잘 풀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소리꾼이 한창 소리를 하고 있는데 고수가 "오늘은 좀 별로네" "어제 잠을 못 잤나?" 하는 추임새를 넣으면 소리 할 맛이 나겠는가.

김청만·조용수 고수의 북장단과 추임새를 연이어 들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그동안 나에게 쏟아졌던 추임새들을 떠올렸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나의 결심을 지지해 주고 제주도에 한 달 집필실까지 마련해 준 아내 덕분에 나는 첫 책의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발간이 되자 기꺼이 내 책을 사 주고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다'는 리뷰를 써준 수많은 독자가 있었기에 나는 카피라이터에서 작가로 직업을 바꿀 수 있었다. 책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며 찾아온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또 어떤가. 나는 그들의 공감과 칭찬 덕분에 스토리텔링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내자고 제안하면서 들려주신 출판사 대표님들이 없었다면 나는 한 권으로 끝난 비운의 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책들이 지렛대 역할을 해 주었기에 지금 네 번째, 다섯 번째 책도 준비 중이다. 북토크를 시작으로 시작된 '글쓰기 강연'은 부족한 원고료와 인세의 틈을 메워주는 주 수입원이 되었는데, 이 또한 나의 강연을 듣고 다른 기관과 기업체에 추천해 주신 분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있다. 판소리에서는 첫째가 고수고 둘째가 소리꾼이라 할 정도로 고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고수 중 잘하는 사람을 '명고수'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날 알았다.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혀 떨어트리는 명포수도 좋지만 다른 사람을 북돋아주는 명고수가 되는 게 한 수 위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송년 판소리 공연에서 들은 새해 덕담은 나 자신에게 해 주는 "그렇지!"라는 추임새였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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