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변호사 3만 명 시대라지만 수임료 때문에 억울한 시민의 ‘나 홀로 소송’이 전체 민사사건의 70%다. 11년 로펌 경험을 쉽게 풀어내 일반 시민이 편하게 법원 문턱을 넘는 방법과 약자를 향한 법의 따뜻한 측면을 소개한다.
강간사건 1심에서 치열하게 무죄를 다투다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을 당한 의뢰인을 만나러 구치소 접견을 갔다. 항소심에서 자백하고 선처를 구하기로 이야기는 다 되었지만 1심 기록을 아무리 꼼꼼히 읽어봐도 의뢰인에게 강간죄가 성립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지난 13회에서 '재판은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제3자인 판사가 하므로 아무리 진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증거로 입증되지 않으면 사실로 인정될 수 없다'고 했는데, 변호인도 제3자이기는 마찬가지다. 진행하는 사건에 대해 증거관계를 검토한 후에 공소사실을 인정할지, 무죄를 다툴지 변론방향을 정하게 된다. 의뢰인이 무죄를 다투고 싶다고 해도, 증거관계가 명확하면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게 좋겠다고 의뢰인을 설득하기도 한다. 유죄의 증거가 확실한데 무죄를 다투면 반성하지 않는 태도로 보여 더 큰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치소에서, "나는 정말 억울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의뢰인의 눈빛은 정말 억울해 보였다. 1심 기록을 검토하며 강간죄 성립 여부를 도무지 판단할 수 없었던 나 또한 의뢰인에게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 바깥에서 고생하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참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다투다가 혹시 잘못되면 꼼짝없이 징역 5년을 살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착잡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고, 1심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후 항소심에서 내 역할은 피해자 대리인과 연락하면서 합의를 진행하는 것이었고, 의뢰인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성인지감수성'이란 용어가 있다. 법조인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겠지만 형사재판에서 성인지감수성의 핵심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폭력 범죄는 은밀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피해자의 진술이 주된 증거일 때가 많고, 사실상 유일한 직접증거일 때도 많다. 그리고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양상은 피해자의 나이, 성별, 지능이나 성정, 사회적 지위와 가해자와의 관계 등 구체적인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도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대처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게 되기 전까지는 피해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가해자와 종전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화가 되었을 때, ①피해자 진술내용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고, ②경험칙에 비추어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고, ③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그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되고,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대법원 2018. 10. 25. 선고 2018도7709 판결).
그러나 한편으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 판단해야 한다는 형사 소송의 대원칙이 성폭력 사건에서는 약간 변형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의 문화와 인식, 구조로 인하여 성폭력 피해자가 받아온 고통에 대한 반작용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성폭력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상정해두고, 이를 벗어나는 행동을 했으므로 피고인은 무죄라는 변론을 성폭력 사건의 주된 변론요지로 삼고 피해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었던 세월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지나가는 과도기가 아닐까 싶다.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는 피고인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현재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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