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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와 군부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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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이 열렸다.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축구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싶었다. 브라질은 결승리그에서 2승을 거두며 1위를 달렸다. 우루과이와의 최종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쥘리메 컵을 사상 처음으로 품을 상황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경기장에 17만 명가량이 운집했다. 결과는 1-2 역전패. 절망에 빠진 브라질 국민 여럿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마라카낭의 비극’이었다.
□ 브라질은 악몽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흰색 유니폼을 노란색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눈물이 환희로 바뀌는 데는 8년이 걸렸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처음 들어 올렸다. 18세 축구 천재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펠레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는 1962년 칠레 월드컵 우승에도 기여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정상까지 차지했다. 브라질 국민은 ‘왕’이라는 별명을 붙여 펠레를 추앙했다.
□ 지난 12월 29일 숨진 펠레는 브라질 국민에게 영웅 이상의 존재였다. 세계 축구 스타들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기도 했다. 그라운드 안과 밖에서 강한 빛을 발산했으나 그에게도 어둠은 있다. 브라질 군부독재(1964~1985)에 협조적이었다는 의혹이 그를 따른다. 펠레는 당초 1970년 월드컵에 참가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출전에는 축구를 악용하려 한 정권의 입김이 작용했다. 펠레는 군부 고위층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브라질 군부독재 기간 434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펠레는 “브라질 국민은 투표하는 법을 모른다”며 민주주의를 폄하한 적도 있다.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펠레’는 펠레의 남다른 삶을 돌아보며 독재에 순응한 그의 과거를 들춘다. 엇비슷한 시기 링을 호령하며 전 세계인에게 많은 영향을 줬던 복서 무하마드 알리(1942~2016)와 슬쩍 비교하기도 한다. 알리는 인종차별에 눈감은 미 정부에 비판적이었고, 병역을 거부해 옥고를 치렀다. 펠레는 신이 준 재능으로 부와 명성을 한껏 누렸으나 브라질 국민의 삶 개선에는 큰 힘을 쏟진 않았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가 그의 죽음을 맞아 ‘펠레: 축구를 넘어, ‘왕’의 정치적 입장이 늘 인기 있지는 않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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