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그저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질 거라고…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한 해를 일주일 남긴 크리스마스 날 오전 11시, 우리 일곱은 다시 모였다. 이 인원 그대로 세 번째 맞이하는 송년 모임이었다. 창가 쪽 테이블 위로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이 하나둘 세팅됐다. 유린기와 명란 파스타, 도다리회와 월남쌈, 프랑켄 와인과 슈톨렌. 요리와 담쌓고 사는 두 청년은 이번에도 마늘탕수육과 치킨을 배달시켰다고 했다. 배달음식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나는 막 해낸 밥과 배추 된장국을 상 위로 날랐다. 여기에 수박무로 담근 동치미와 곶감 샐러드까지 올리니 기다란 테이블이 한 상 가득 화려해졌다.
햄스트링 부상으로 오른쪽 허벅지가 아프고 몸살 기운마저 있었지만 한 달 전에 약속된 모임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누구보다 이 만남이 간절한 사람은 나였다. 2022년은 우리 모두에게 쉽지 않은 한 해였다. 일곱 명 모두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됐으며 저마다 중요한 삶의 분기점을 지나느라 애썼다. 배불리 먹고 마시며 서로 안부를 묻는 얼굴에 화색이 돌고 우리의 수다는 무르익었다. 올해 새 비즈니스를 론칭한 30대 사업가는 특유의 코믹한 입담으로 자신의 멍청한 실수와 성공담을 펼쳐냈다. 회사에서 새로운 데이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느라 추석 연휴까지 반납한 젊은 엔지니어의 피땀 어린 분투기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묵직한 감동을 주었다.
오후 3시, 나른해진 친구들이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져 낮잠을 잘 때 나는 안방으로 들어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신애씨한테 연락이 왔어. 네 안부 묻더구나. 과천 사는 오신애씨, 기억하지?" 기억하다마다. 아픈 허벅지에 온열 찜질기를 대고 누워 여섯 명 용사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16년 전, 같은 날 오른쪽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여섯 명의 70대 여인들이 한 병실에 누워 있었다. 흔한 수술이라고 해도 전신마취 후 무릎뼈를 잘라내고 인공관절을 박는 일이었다. 엄마 곁을 지키느라 수술 직후 꼬박 하루 동안 그분들이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던 모습을 지켜본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모두의 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그들은 미소를 찾았지만 나는 혼자 가시방석이었다. 나흘 뒤면 그들은 왼쪽 무릎을 수술대 위에 올려 똑같은 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저리 태연할 수 있을까. 김치말이 국수를 배불리 드신 어른들에게 다시 또 끔찍한 아픔을 참아내야 하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지금보다 나아지려고 하는 수술이잖아. 하루 이틀 아픈 거야 눈 질끈 감고 참으면 그만이지." "그럼. 이 나이에 병원에 들어와서 성한 몸으로 돌아가는 것만도 하늘에 감사할 일인걸." 의연한 표정을 보며 오싹 소름이 돋았지만, 그때 그들의 말이 삶의 고비마다 나를 위로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한숨 잔 친구들이 깨어났을 때 나는 다시 상을 차렸다. 올해가 지나면 우리 일곱이 이렇게 둘러앉아 송년회를 할 기회는 아마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공부를 중단했던 두 부부는 보름 뒤 미국으로 돌아간다. 청년 사업가는 내년 봄 결혼해 새 가족을 꾸린다. 올 한 해 죽어라 아프기만 했던 나는, 그때쯤이면 건강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그저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 흔한 소망에 기대어 먹고 마시고 보드게임을 하고 수다를 떠는 사이 어둠이 찾아오고 밤이 깊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