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상공의 무인기

입력
2022.12.30 18:00
22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고려시대 강화도 간척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자료: 최영준 , 국토와 민족생활사

고려시대 강화도 간척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자료: 최영준 , 국토와 민족생활사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좁은 곳의 폭이 300m에 불과한 20㎞ 길이의 강화해협, 혹은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동쪽 육지 김포와 격리되어 있다.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이 모이는 어귀여서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 강화도가 없었다면 고려 왕조는 1230년 무렵 멸망했을 게 틀림없다. 무신정권은 염하를 장벽 삼아 몽골 침략을 40년 가까이 버텼다. 개경을 버리고 강화로 도읍을 옮긴 그들은 섬에 철옹성을 구축했다. 지금의 강화읍 관청리에 궁궐을 짓고 그 주위에 약 2㎞ 성벽을 건설했다. 해안가에는 외성도 쌓았다. 1250년에는 궁성과 외성 사이에 중성을 새로 지었다. 염하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질퍽질퍽한 갯벌도 힘겨웠던 몽골에 고려의 방어시설은 상륙 작전의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1270년 고려 원종이 스스로 개경환도를 선언하기 전까지 몽골은 단 한 차례도 상륙작전을 꾀하지 않았다.

□ 대륙기마병에 대한 강화도의 옹성 신화는 400년 만에 깨졌다. 무능한 조선 인조 정권의 판단 착오 때문이었다. 인조 정권은 고려의 대몽 항쟁 시 구축한 성곽과 간척사업으로 초래된 지형 변화가 갖는 전술적 의미를 간파하지 못했다. 이중환 택리지의 ‘팔도총론’에 따르면 여말선초 이뤄진 간척사업으로 몽골 기마병의 상륙을 저지했던 강화 갯벌은 병자호란 당시에는 거의 사라졌다. 1637년 1월 22일(음력) 새벽, 미리 준비한 100여 척에 각각 50~60명씩 타고 바다를 건너온 청나라 군사에게 단 하루 만에 강화가 함락됐다. 강화 함락 8일 만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 강화도는 최근 몇 년 평화분위기로 가득했다. 해병대의 대북 대응태세도 비슷했다고 전해진다. 정권교체 직후인 지난 6월 인근을 지날 때 휴일 아침인데도 해병대에서 포성이 이어졌다. 현지 주민은 “지난 정권에서 훈련 축소로 쌓였던 재고포탄을 소진하는 중”이라며 “군대 훈련 부족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 훈련 부족은 강화도, 석모도 상공에 떴던 북한 무인기의 무사귀환으로 이어졌다. 현란한 수사와 말만으로 안보가 얻어진다면, 세상에 전쟁이 어디 있으랴.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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