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앞에 서면 끔찍한 공포감…발표 피하다 F학점까지 받았어요"

입력
2023.01.02 04:30
수정
2023.01.02 11:06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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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대학에 다니기 시작한 후 발표 공포증을 달고 삽니다. 제가 전공하는 학과는 각자 과제물을 교수님과 학우들에게 보여주고 비평하는 수업이 유독 많습니다. 그때마다 위협적이고 끔찍한 일이 닥칠 것 같은 공포감을 느껴요. 발표를 하루 앞둔 시점부터 발표를 마칠 때까지 긴장감과 공포감이 저를 맴돌아서 너무 힘이 듭니다.

7살 때는 유치원 학부모 참관 수업 때 여러 친구들과 부모님들 앞에서 뜀틀 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남들이 나를 주목한다는 것이 너무 공포스럽게 느껴졌어요. 제 차례까지 다가왔을 땐 뜀틀도, 날 보는 사람들도 너무 무서워 뜀틀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 주저앉아버렸어요. 어머니께서 전해주시기로는 당시 유치원 선생님이 제가 뜀틀을 넘을 때까지 기다렸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제 이름과 '파이팅'을 외치자 제가 그제서야 뜀틀을 넘었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내내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초등학생 시절 모든 반 아이들이 방학숙제를 발표하는 날 무서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던 사건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담임선생님은 제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지만 끝까지 제가 말을 하지 않자 다음 순서로 넘어갔어요. 얼마나 창피했었는지 모릅니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이런 공포감을 거의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몇 년간 이런 발표 경험이 쌓이면 공포심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저의 모습, 제가 한 작업 결과를 보여줄 때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그 공포감이 극심해지면 결국 수업을 결석해버리는데 그래서 F학점을 받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괴팍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불안증이 생긴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가족들에게 자주 화를 내는 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6살이었던 제가 밥을 흘리고 먹는다며 크게 화를 내신적이 있어요. 그때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울지도 못했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의 성격도 할아버지와 비슷했어요. 아버지와 스키장을 갔을 때였어요. 리프트를 올라갔을 때 무서워 움직일 수 없었던 제게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저를 버리고 혼자 내려가셨어요. 저에게 어떻게든 혼자 타고 내려오라는 말을 남기고요. 저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지만 결국 혼자 스키를 타지 못하고 장비를 들고 걸어서 밑으로 내려갔어요.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걸핏하면 화를 내고 폭언을 쏟아내셨습니다. 내면에 분노와 불안이 쌓이면서 우울증까지 왔어요. 19살 때는 결국 자퇴를 하게 됐고, 심리상담도 받았죠. 검정고시로 학업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우울증이 심해져 정신과치료도 받았습니다.

저는 제 성격을 극복하고 싶어서 노력을 많이 해왔습니다. 칭찬을 많이 받으면 이런 공포심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정말 열심히 과제를 해서 좋은 평가를 받은 적도 있어요. 일부러 발표에 적극 나서서 참여해본 적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칭찬을 받아도,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수치심과 공포심이 여전합니다. 도무지 그 실체를 모르겠습니다. 남에게 떨리는 마음을 솔직히 이야기해봐도,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이 공포감과 수치심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허무하고, 이제는 절망적이기까지 해요.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신자영(가명·28·대학생)

자영씨,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부대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는 의미죠. 자영씨의 말대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평가하고 평가받는 과정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평가 자체는 누구에게나 부담이지만 성취의 기쁨을 느끼고 좌절을 극복하는 경험을 하며 성장하는 것이죠. 자영씨가 느끼는 괴로움은 매일 마주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 피할 수도 없고, 반복되기 때문에 고통이 더 클 거예요. 매일 남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는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저는 이해할 수 있어요.

자영씨는 자신의 일에 열심히 매진하는 성실한 사람이에요. 성장하려는 의지가 커서 수업에도 열심히 참여하려고 하고 결과도 좋은 편이지요. 그런데 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요? 사람은 한 번 대인관계 방식을 습득하면, 습득된 대인관계 패턴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습득한 '조건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죠. 자영씨는 어린 시절 남들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수치심이나 공포를 느꼈던 사건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내면에 불안이 깊게 자리 잡게 된 것 같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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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타고난 기질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섬세하고 민감한 성격으로 인해 낯선 환경에서 더 예민해지고, 남들의 생각을 지레짐작해 위축되는 경우가 많았을 거예요. 자신의 불안한 내면 상태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더해지면서 내면의 불안이 더 커진 것이죠. 결국 자영씨를 힘들 게 하는 건 외부 상황이 아니라 자영씨의 내면인 것이죠.

이를 자영씨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정작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을 만나면 긴장감이 고조돼 '결국 모욕을 당할 것이다'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죠. 그 감정을 상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 자체를 회피하고 외면하면서 지내왔을 겁니다. 상담을 하는 담당의에게도 말을 안 할 정도로요. 이른바 '사회불안장애'를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문제를 인지하고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러려면 괴로운 감정상태를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끝까지 회피해 문제가 커지는 것이죠. 다른 문제로 치료를 받다가 담당의에게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특히 많은 이유입니다.

자영씨는 타인의 반응을 특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같아요. 부정적인 평가뿐 아니라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도 두려움을 느끼죠. 실제 평가의 결과가 어떤 것이든, 감정의 모든 회로가 불안과 공포로 빠르게 움직여요. 결국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자영씨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런 패턴을 명료화하지 않는다면 평생 비슷하게 반복될 거예요. 결국 대인관계나 사회생활 자체가 힘들어지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악화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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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평가뿐 아니라 자영씨 스스로 인정할 만큼 자랑스러운 행동을 하지 못하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요. 많은 대중 앞에 섰을 때 떨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불안하고 떨리는 것 자체는 전혀 부끄러울 일이 아니에요.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에요. 떨리고 불안한 상태의 내 자신이 보기 싫고 용납이 안 되는 것이죠.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도 F학점을 맞을 정도로 수업에 나가지 않는 건 왜일까요. 마음속 깊은 곳에 자영씨 스스로 느끼는 수치심이 있어요. 발표를 잘하지 못해도,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대학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과는 다르죠. 스트레스의 정도가 매우 크기 때문에 무조건 상황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갑자기 내면의 수치심과 맞닥뜨리고 그 원인을 짚는 것이 지금 자영씨에게 너무 괴로울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자영씨의 인생을 격려하고 응원하기 때문에 자영씨가 조금 다른 관점으로 이 문제를 직면하길 바랍니다. 일단 희망적인 건 자영씨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내면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는 사실이에요.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해왔듯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보다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을 인정해주고, 남들 앞에서 긴장되고 떨리는 그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매일 필요해요. 대중 앞에 서서 다시 목소리가 떨리더라도 '긴장되는 게 당연한 거다' '떨었지만 잘했어'라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세요. 떨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해야 다른 사람에게도 내 상태를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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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신의 불안한 상태를 안팎으로 드러내 꽁꽁 숨겨 놓았던 수치심을 극복해나갔으면 좋겠어요. 확실한 건 숨기는 것보다 오픈하는 것이 긴장감을 줄이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이에요. 발표를 시작하기 전 대중을 바라보고 '열심히 준비했지만 떨린다'라고 말해보세요. 긴장된 마음을 인정해주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약물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약물로 '떨리는 증상' 자체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 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이어갈 수 있고,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자신이 생길 거예요. 근본적인 치료라기보다 행동치료를 하기 위한 일종의 '전 처치' 개념이죠.

자영씨, 피할 수 없으면 마주해야 해요. 능력이 있고, 꿈이 있는데 정작 실체 없는 수치심과 불안감에 발목 잡혀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끝나버리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자영씨는 이 점을 이해하고, 더 튼튼한 내면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발목 잡히는 삶이 아닌 한 걸음 더 딛는 자영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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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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