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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당선작] '래빗 헌팅'

입력
2023.01.02 04:30

당선자 이경헌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래픽=박구원 기자

등장인물

미술 30대 초반 남자

수학 40대 중반 남자

윤리 30대 후반 남자


고등학교 숙직실. 숙직실은 전반적으로 어둡지만 중앙에 설치된 갓등 주변은 환하다. 갓등 아래에는 무릎 높이의 낮은 테이블이 있다. 미술과 수학은 테이블을 마주보고 앉아있다. 테이블에는 트럼프 카드와 카지노칩이 있다. 두 사람은 텍사스 홀덤을 하는 중이다. 수학은 미술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본다. 미술은 수학을 바라보지 않는다.

수학: 사람들은 포커를 단순하게 도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포커는 바카라 같은 도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바카라를 하는 사람들은 행운을 기대하지만 포커를 하는 사람들은 확률을 계산하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포커가 수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사실은 아닙니다. 수학을 통해 확률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결국 승부를 결정짓는 우연은 계산의 영역 바깥에 있거든요.

미술은 자신의 카지노칩 한 줄을 테이블 중앙으로 옮긴다.

수학: 나는 포커가 인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 대한 은유라면 먼저 바둑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머리 좋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환상에 가깝습니다. 인생은 바둑처럼 좋은 실력을 가졌다고 이기는 매끈한 구조가 아니지 않습니까. 포커처럼 경우의 수를 계산하면서 확률을 높이려고 애써보지만 우연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는 게 인생이죠. 통제할 수 없는 변수 속에서, 제한된 정보를 붙들고, 끊임없이 선택을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내가 포커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미술: 그렇지만 사람들은 학교 숙직실에서 포커를 치는 교사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수학: 오늘 처음 해보는 거 맞습니까?

미술: 원래 기본적인 규칙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수학: 너무 잘하는데요…… 죽겠습니다.

수학은 자신의 카드를 테이블 중앙으로 던진다.

미술: 이제 본론으로 넘어갔으면 좋겠는데요.

수학: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이선생이 포커를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선생은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잖아요. 흔히 말하는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예상 밖이네요.

미술: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수학: 우선 포커를 조금만 더 치다가……

미술: 저는 이 상황이 불편해요.

수학: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라서 그런가요? 선을 긋는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수학은 테이블에 쌓인 카지노칩을 미술 앞으로 밀어준다.

수학: 나는요. 이선생이 나를 경멸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미술: ……뭐라고요?

수학: 경멸하는 마음을 가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그런 사람을 한 명 정도는 데리고 살지 않습니까? 하지만 경멸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지난주 회식 자리에서 이선생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 그래요. 말씀드릴게요. 어차피 조만간 말하려고 했거든요.

수학은 미술의 카지노칩을 대신 정리해준다.

미술: 중간고사가 끝났을 무렵이니까…… 두 달 정도 전이었을 거예요. 저는 교무실 앞을 지나가다가 박선생님과 윤주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어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삼십 분은 넘었을 거예요.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해요. 창문을 통해 건너다봤는데 윤주가 울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날 윤주가 그렇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요.

수학: 아……

미술: 그런데 박선생님은 교육청 조사를 받을 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더라고요. 저는 박선생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숨기는 게 아니라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수학: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습니까?

미술: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거든요. 박선생님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증명할 방법이 없잖아요.

수학: 그게 나 몰래 우리반 애들을 면담한 이유였네요. 그래서 뭘 좀 알아냈나요?

미술: 글쎄요.

수학은 카드를 섞고 미술과 두 장씩 나눠가진다.

수학: 사립학교 선생은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중 하나는 순환이 없다는 거겠죠. 껄끄러운 동료가 있더라도 한 명이 그만두기 전까지는 계속 마주쳐야 하잖아요. 사실은 그래서 이선생에게 시간을 좀 내달라고 한 겁니다. 이제 한식구가 되었으니까 오해를 바로잡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가 어긋난 건…… 안윤주 때문이었네요.

미술: 그 표현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수학: 젊은 선생들은 애들이 죽으면 충격을 받는 바람에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미술: 어떤 교사들은 학생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지도 못하고요.

수학: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다 보면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나 봅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나는 그걸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만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믿음. 그거 자의식 과잉이거든요.

미술: 학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요. 교사는 학교라는 닫힌 공간에서 지표가 되는 사람이고요. 그걸 부정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수학: 사람은 원래 죽습니다. 애들도 사람이고요.

수학은 손짓으로 테이블을 가리킨다.

미술은 자신의 카드를 확인하지 않고 카지노칩 한 줄을 테이블 중앙으로 옮긴다.

수학: 선생 노릇을 이 정도 하다 보면 다양한 죽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애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마을버스에 깔려서 머리가 터지고요. 어떤 애는 노래방 도우미를 하다가 마이크 줄에 목을 매답니다. 만약 누군가 죽을 것 같은 아이를 특정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자살할 확률이 높은 특성을 찾아내는 건 가능합니다. 자살하는 애들은 대부분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습니다.

미술: 윤주가 그렇게 된 게 가정환경 때문이라는 말인가요?

수학: 이건 내 견해가 아니라 통계입니다.

미술: 윤주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어요. 잘 알고 계셨겠지만요.

수학: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따돌림을 당한 것도 가정환경이 문제였을 확률이 높습니다. 애들은 원래 괴롭혀도 괜찮을 애를 선택하거든요. 그건 잘못된 행동이지만 선생 한 명이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미술: 이게 박선생님이 죄책감을 덜어내는 방식인가요? 박선생님은 슬프지도 않으세요?

수학: 안윤주는 우리반 애였어요. 어떻게 슬프지 않겠습니까?

수학은 자신의 카드를 확인하고 카지노칩 한 줄을 테이블 중앙으로 옮긴다.

미술: 박선생님 반응은 제 예상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네요.

수학: 이선생은 마음속에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것 같습니다.

미술: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아요. 저는 박선생님을 고발할 생각이에요. 경찰서든 교육청이든 상관없어요. 재조사를 요청할 거예요.

수학: 고발이라고요……

수학은 미술을 바라보며 웃는다.

수학: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정보만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것을 동기화된 추론이라고 하는데요. 이선생은 그 함정에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미술: 잘못한 게 없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수학: 이선생은 교육청 조사를 받을 때 상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가해자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도대체 그런 확신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현실은 일차방정식 같은 단순한 구조가 아닌데 말입니다. 나는 이선생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미술: 갑자기 박선생님이 초조해보이는데요. 제 착각인가요?

수학: 잠시만요. 누군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미술: ……뭐라고요?

윤리가 숙직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미술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윤리: 뭐야? 이 상황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미술: ……현선생님?

윤리: 설명을 하라고. 괜히 부르지 말고.

미술: 충분히 오해하실 만한 상황인데요. 그런데 그런 거 아니에요.

윤리: 뭐라는 거야.

미술: 박선생님께서 할 말이 있다고 부르셨거든요.

미술은 수학을 바라본다. 수학은 반응하지 않는다.

미술: 그러니까 이런 걸 하려고 온 게 아니라……

윤리: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고 그러냐.

미술: 박선생님 말씀 좀 해보세요!

윤리: 잘못하다가 걸렸으면 그냥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되잖아?

미술: 잠깐만요. 제가 전부 설명할게요.

윤리: 설명하긴 뭘 설명하냐? 나만 빼놓고 카드 친 거잖아!

윤리는 미술과 수학 가운데 자리에 앉는다.

미술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윤리: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저는 박선생님밖에 없는데요……

수학: 미안합니다. 이선생이랑 할 얘기가 좀 있었습니다.

윤리: 바람피우는 애인한테 매달리는 심정이네요. 언제부터 친 거예요?

수학: 삼십 분? 삼십 분 만에 이렇게 됐네요.

윤리: 박선생님을 잡았다고요? 이선생 너 정체가 뭐냐? 혼자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미술: 아니요. 저는 박선생님과 대화하려고 온 거예요.

수학: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깜짝 놀랐습니다.

윤리: 야자 감독하면서 순찰을 돌고 있었는데 숙직실 불이 켜져 있길래요.

수학: 어차피 애들은 전부 야자실에 있지 않습니까?

윤리: 애들한테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식시켜야죠. 안 그러면 지들끼리 빈 교실 같은 데 숨어서 이상한 짓을 한다니까요. (음흉하게 웃으며) 걔들도 몸은 다 컸잖아요. 원래 애들은 믿어주는 만큼 뒤통수를 치는 법이에요. 요즘 선생들은 친구 같은 선생이 되겠다고 하는데 그거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개소리죠. 애들한테 필요한 건 오직 감시와 처벌! 아닌가요?

윤리는 미술과 수학의 카드를 확인한다.

수학: 선생 같은 선생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윤리: 박선생님 같은 분만 계신다면 걱정이 없을 텐데요.

수학: 과찬이십니다. 현선생 눈에 이선생은 어떻습니까?

미술: ……박선생님!

윤리: 이선생이요? 이선생처럼 단단한 허벅지를 가진 신입은 드물긴 하죠. 무엇보다 애들한테 열정적이고요. 충동을 조절하는 방법만 배운다면 괜찮은 선생이 될 재목 같은데요. 그런데 갑자기 이선생은 왜 물어보세요?

윤리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윤리: 아이고!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이거 이선생 야단치는 자리였구나……

미술: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수학: 야단이라뇨. 얼마 전에 내가 이선생에게 혼나지 않았습니까?

윤리: 박선생님한테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라. 다른 분들 같았으면 너 가만히 안 뒀다.

미술: 제가 어떤 상황인지 말씀드린다고요.

수학: 우리는 퇴근하고 한 게임 하는 걸로 할까요?

윤리: 그러면 금방 끝내고 바로 오겠습니다.

미술: 잠깐만요……

윤리: 이선생아 반성하지 않는 인간에게 발전은 없다는 걸 명심하자.

윤리는 숙직실 문을 향해 몸을 돌린다. 수학은 윤리에게 술을 가져오라는 손동작을 한다. 윤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미술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윤리는 숙직실에서 퇴장한다. 수학은 웃음을 참는다.

수학: 이선생 당황하는 모습을 다 봅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미술: 이상한 오해를 받을 만한 상황이었잖아요!

수학: 그건 미안합니다. 현선생을 잘 모르는 이선생 입장에서는 난처했겠네요.

미술: 이거 박선생님 부탁이었어요. 그런데 모른 척하는 건 무슨 경우예요?

수학: 내가 이선생을 변호해줄 이유는 없잖습니까?

미술: ……뭐라고요?

미술은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한다.

수학: 이선생이 좋아하는 본론으로 돌아가볼까요?

미술: 현선생님한테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겠다고 약속하세요.

수학: 이선생은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무게중심을 두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현선생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신경 쓰는 걸 보면 말이에요.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요? 내가 이선생은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현선생은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미술: 애들을 대상으로 저속한 농담을 하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수학: 그런데 그런 현선생보다 나를 경멸한다고요? 어쨌든 그런 모습을 종합해보면 이선생이 나를 모함하려는 목적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술: 제가 박선생님을 모함하려고 한다고요?

수학: 나는 이선생의 방식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아는 편이거든요.

수학은 테이블에 앞면이 보이도록 세 장의 카드를 펼쳐놓는다.

수학: 이해를 도와줄 짧은 일화를 소개해도 괜찮겠습니까?

미술: 마음대로 하세요.

수학: 재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나는 정기적으로 홀덤펍에서 개최하는 포커 토너먼트에 참여하는데요. 그날은 이상할 만큼 운이 좋았습니다. 확률을 고려한다면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들도 전부 좋은 결과로 연결되더라고요. 덕분에 토너먼트가 끝난 다음에는 상금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작은 실수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법은 포커 토너먼트 보상으로 금전을 주는 것을 금지하는데 나는 계좌이체로 상금을 받은 것입니다. 현금으로 받았어야 했는데 흥분한 상태라서 안일했던 거죠. 하필이면 그 홀덤펍이 경찰 단속에 걸리는 바람에 상황이 귀찮아졌습니다. 어쩌면 운에는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경찰서를 방문하고 진술서를 쓰면 끝날 일이었죠. 그런데 경찰이 연락했을 때 나는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수업시간이라서 휴대폰을 교무실에 두고 왔었거든요. 그건 분명한 내 잘못이었죠. 진짜 문제는 옆자리 선생이 그 전화를 받아버린 거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선생들 사이에 안좋은 소문이 돌았어요. 그 이후에는 내가 교무회의에서 어떤 의견을 제시해도 반응을 해주지 않더라고요. 마음속에서 나를 도박 중독자라고 결론지었기 때문이겠죠.

미술: 도대체 그게 저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죠?

수학: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다들 이선생을 매우 좋아하더라고요. 동료 선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이선생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 같은 건 없거든요. 그런 좋음 같은 건 총량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선생은 나를 희생시키면서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겁니다.

미술: 박선생님은 상황을 해석하는 관점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저는 박선생님이 윤주와 상담했다는 사실을 숨긴 이유를 의심하는 거예요. 그리고 말씀하신 이야기에서 박선생님이 잘못한 것은 휴대폰을 교무실에 둔 게 아니라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이고요. 본인이 잘못한 것은 전부 외면하면서 피해자 흉내를 내고 있는 걸 모르세요?

수학: 내 평판에 흠집을 낼 의도가 없었습니까?

미술: 그런 데 관심 없어요.

수학: 그렇다면 지난주 회식 자리에서 나에게 한 말은 무엇입니까? 선생 자격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주변에는 동료 선생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건 계획된 행동처럼 느껴졌는데 말입니다.

미술: 그건……

수학: 술에 취했다는 변명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미술: 술김에 한 말은 맞지만 실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술을 마신 덕분에 할 말을 한 것에 가깝죠. 저는 여전히 박선생님에게 교사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언행을 한 건 사과드릴게요.

수학: 이선생은 단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전체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그래요. 어쩌면 이선생 말처럼 나는 선생 자격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은 말입니다. 지적을 당하면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반감을 느낍니다. ‘네가 뭐라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하냐……’ 그런 생각부터 드는 법이에요.

수학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린다.

수학: 이선생은 나를 지적할 만큼 깨끗합니까?

미술: 저는 적어도 박선생님처럼 살지는 않았어요. 윤주와 상담한 게 밝혀진다면 책임을 물을까봐 숨기신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윤주가 도와달라고 부탁한 걸 외면하기라도 했나요? 제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박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고 살았을 거예요. 안 그런가요!

수학: 이선생은 본인 아버지가 이사장님 골프 치는 데 열심히 따라다니는 걸 모르셨습니까?

미술: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수학: 그 행동이 임용에 영향을 미쳤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입장에서 상황을 해석합니다. 그게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이유겠죠. 이선생은 뒷돈을 주고 선생이 된 것을 애들한테 말할 수 있습니까?

미술: 대응할 가치를 못 느끼겠네요.

수학: 관행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미술: 박선생님은 본인 마음대로 인과관계를 만들고 있어요. 제 임용에 아버지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공정하지 않은 해석이라고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수학: 포장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됩니까?

미술: 그렇지만 저는 박선생님의 영향이 훨씬 컸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수학: 이선생 임용과 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거죠?

미술: 박선생님 같은 분에게 학생들을 맡길 수 없다는 학교 측의 판단이 있었을 거라고 봐요.

수학: 미술을 공부한 사람의 관점이 이렇게 편협해도 괜찮습니까?

미술: 우리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요. 제발 착각하지 마세요.

미술은 자신의 카드를 확인한다.

미술: 정말 윤주가 따돌림당하는 걸 모르셨어요?

수학: 방금 전에 알았습니다. 이선생에게 들은 다음에 말입니다.

미술: 옆반 학생들조차 전부 알고 있었다는데요. 그런데 담임이 그걸 몰랐다고요?

수학: 이선생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누구라도 원망할 대상을 만들고 싶을 거예요. 그게 무고해지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잖아요?

미술: 학생들과 상담하면서 박선생님이 윤주의 따돌림을 방관했다는 증언들을 확보했어요.

수학: 질문의 방향이 대답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정적.

수학: 계속 말씀해보세요.

미술: 박선생님은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거예요. 그건 학생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학교폭력은 학교라는 집단의 구조적인 문제라고 자기합리화를 했겠죠. 물론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박선생님의 무책임함은 윤주를 죽음으로 내몰았어요. 그런데도 잘못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면 역겨움을 참기 힘드네요.

수학: 부지런하게 면담을 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미술: 교장 선생님께 직접 말씀드리세요. 저는 박선생님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요.

수학: 그런데 나도 애들한테 들은 게 있습니다.

수학은 자신의 카지노칩을 정리한다.

수학: 안윤주에게 개인교습을 해주셨더라고요?

미술: ……

수학: 만약 숨기는 게 아니라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을까요?

미술: 개인교습은 잘못된 표현 같네요. 맞아요. 윤주는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랬지만 따로 미술을 배울 만큼 여유로운 가정환경은 아니었고요. 그건 박선생님이 잘 알고 계시잖아요? 기초적인 과제를 내주고 방향을 점검해준 것뿐이었어요.

수학: 그걸 담임에게 상의조차 하지 않았다고요?

미술: 상의할 만큼 대단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수학: 그런가요?

미술: 그런데 되돌아보면 후회가 되네요. 윤주가 미술실로 찾아온 이유는 미술에 대한 흥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거든요. 학교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한 사람을 원했던 거겠죠. 이런 상황을 미리 알았다면 윤주를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요.

수학: 미술실에서 단둘이 개인교습을 한 건 맞습니까?

미술: 논점이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요?

수학: 이선생은 애들을 대하는 태도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애들은 이선생에게 개인교습을 받는 안윤주를 질투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게 따돌림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들 이선생을 좋아하니까요. 어쩌면 이선생의 잘못된 판단이 안윤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건 아닐까? 이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미술: 박선생님!

수학: 인생은 불확실성이라는 지반 위에 지어지는 건축물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확신은 착각에 불과하죠.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카드는 상대방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선생의 확신이 의심스럽습니다. 혹시 이선생과 안윤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닙니까?

미술: 함부로 지껄이지 마……

미술은 수학의 멱살을 잡는다. 수학은 저항하지 않는다.

윤리가 숙직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손에 맥주병을 든 모습이다.

윤리: 뭐야? 이 상황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미술: 자리를 좀 비켜주세요.

윤리: 이선생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거 안 놓을래?

미술: 현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윤리: 야! 그거 놓으라고!

미술: 아무것도 모르면 끼어들지 말고 빠지라고요.

윤리: 이새끼가 진짜 미쳤나……

수학: 나는 괜찮습니다. 그만하세요.

윤리: 그거 놓으라고 분명히 말했다.

미술은 수학을 밀쳐버린다.

윤리: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말하면 대가리 확 찍어버린다.

수학: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인데요. 그런데 그런 거 아닙니다.

윤리: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저런 행동은 말이 안 되는 거죠.

미술: 어떤 상황인지 모르면 개입하지 말라고요.

윤리: 박선생님 그동안 우리가 이새끼한테 완전히 속은 것 같은데요? 술 처먹고 난동부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요?

수학: 그런데 현선생은 무슨 일인가요?

윤리: 예? 아…… 저는 이새끼 챙겨주겠다고 이걸 가져왔네요.

수학: 어쨌든 현선생이 오해하는 것 같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윤리: 박선생님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놈을 감싸주세요?

수학: 앞으로 같이 가야 할 동료 아닙니까.

윤리: 저런 선생 같지도 않은 놈을……

미술: 현선생님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윤리: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윤리는 미술에게 다가간다.

윤리: 나한테 들을 말이 아니라고?

수학: 현선생 진정하세요.

윤리: 이새끼 말하는 거 들으셨잖아요!

미술: 두 분은 본인을 선생 같은 선생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요. 다른 교사들은 두 분을 같은 교사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그걸 내색하지 않는 이유는 같이 엮이는 것조차 원하지 않기 때문이고요.

윤리: 그딴 개소리를 하려면 근거라도 제시해야 하는 거 아니냐?

미술: 현선생님이 생각하는 선생 같은 선생은 뭔데요? 애들을 대상으로 음담패설을 하는 게 선생 같은 선생인가요? 학교폭력을 모르는 척 방관하는 게 선생 같은 선생인가요? 초과근무 올려놓고 숙직실에서 술 마시고 도박하는 게 선생 같은 선생인가요? 감시와 처벌이 필요한 건 두 분 아니냐고요!

윤리: 갑자기 왜 나한테 지랄이야!

수학: 그만! 그만하세요.

윤리: 박선생님 이건 좀 아니잖아요.

수학: 나 이선생이랑 마무리할 얘기가 있습니다.

윤리는 미술을 바라보며 웃는다.

윤리: 이새끼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제 알 것 같네요. 얼마 전에 자살한 여자애 때문에 이러는 거 맞죠? 박선생님이 걔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누굴 탓하는 거야.

미술: 경고하는데 그 입으로 윤주에 대해 말하지 마세요.

윤리: 너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을 하냐? 걔랑 몰래 사귀기라도 했어?

미술: 현선생님!

수학: 현선생은 이만 야자실로 돌아가세요.

윤리: 박선생님 이새끼 반응을 좀 보세요!

수학: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세요.

윤리: 이선생아 지금 네 행동을 한번 되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미술: 그쪽 수준으로 누구한테 충고하려고 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윤리: 정신 나간 새끼.

윤리는 숙직실에서 퇴장한다.

미술은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한다.

수학: 감정을 조금 가라앉히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술: 제가 박선생님을 너무 얕잡아 본 것 같네요.

수학: 그게 무슨 말인가요?

미술: 박선생님은 저와 단둘이 대화할 때는 이상한 주장을 반복하면서 감정을 자극했어요. 그런데 현선생님 앞에서는 정상적인 모습을 연기하면서 상황을 중재하시네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요.

수학: 모든 사람들은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방금 이선생도 마찬가지고요.

미술: 아까부터 우리가 비슷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요……

수학: 현선생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건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미술: 이런 반응을 유도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려버렸네요.

수학: 이선생 입장이 난처해진 건 맞는 것 같습니다. 현선생과의 불편한 관계가 걱정된다면 우리 문제부터 빨리 매듭짓는 편이 좋겠습니다.

미술: 어설픈 협박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지 마세요.

수학: ……이선생 차례입니다.

미술: 이 상황에서 이런 게 중요하세요?

수학은 미술을 빤히 바라본다.

미술은 자신의 카지노칩 한 줄을 테이블 중앙으로 옮긴다.

수학은 자신의 카지노칩 전부를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넣는다.

수학: 올인 하겠습니다.

미술: 박선생님과 더 이상 대화하는 건 무의미한 것 같네요.

수학: 이선생은 본인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으면 전부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하니까요.

미술: 먼저 일어나볼게요.

수학: 이선생은 여전히 내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미술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학: 그러면 그때 상황을 가정해보면 어떨까요?

미술: 박선생님! 우리가 가르친 학생이 죽었어요. 그런데 지금 뭐하자는 거죠? 우리는 교사잖아요! 아무도 우리에게 이걸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고요. 그렇다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자는 말이에요!

수학: 안윤주가 교무실로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미술: ……

수학: 이선생이었다면 어떤 대답을 돌려줬을 것 같습니까?

미술: 정말 이렇게까지 한심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수학: 대답해보세요.

미술: 따돌림당한 정황을 파악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겠다고 약속했겠죠! 앞으로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항상 옆에서 도울 거라고 말했을 거라고요!

수학: 이선생이었다면 나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네요.

미술: 어떤 교사를 붙잡고 물어보든 똑같은 대답을 할 거예요.

수학: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선생도 내 입장이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미술: ……뭐라고요?

수학: 이선생 주장대로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안윤주를 외면했다면요? 학교 입장에서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불편하니까요. 만약 그랬다면 나를 어떻게 할 겁니까? 나는 이선생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은 경찰서든 교육청이든 당장 달려갈 것처럼 말했지만요. 현실은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선생에게는 이제 지켜야 할 자리가 생겼거든요. 어렵게 뒷문으로 들어오자마자 내부고발자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웃긴 얘기 아닙니까?

수학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술 앞으로 다가간다.

수학: 좋은 패를 받았다고 이기는 것도 나쁜 패를 받았다고 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베팅이죠. 초보자들은 베팅을 할 때 자신에게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잘못된 선택이에요. 베팅은 상대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과감하게 해야 합니다.

미술: ……

수학: 그런데 베팅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잃을 거 없는 애들한테는 안 통한다는 거예요. 자포자기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요. 이게 지금까지 이선생을 내버려둔 이유입니다. 이선생이 미친개처럼 날뛸 수 있었던 건 단지 무능했기 때문이라고요.

미술: 박선생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밝혀낼 거예요……

수학: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네요.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수학은 테이블 서랍에서 봉투를 꺼낸다.

수학: 포커에는 래빗 헌팅이라는 게 있습니다. 게임을 포기한 상태에서 만약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떤 패가 깔렸을지를 확인해보는 거예요. 자신의 패를 집어던지는 순간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예정되었던 운명을 확인해보는 거죠. 전지적인 시점에서 말이에요. 그런데 나는 래빗 헌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게 추후에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는 데 혼선을 만들거든요. 어차피 결과를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걸 확인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미술: ……

수학: 이선생이 본 것처럼 그날 나는 안윤주와 삼십 분 정도 대화를 나눴습니다. 안윤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어떤 대답을 돌려줬는지 정말 알고 싶습니까?

미술: 무슨 변명을 하든지 내가 믿을 것 같아요?

수학: 그렇지만 안윤주가 나에게 편지를 남겼다면 어떨까요? 여기에는 내가 교육청에 상담한 것을 말하지 않은 이유가 적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안윤주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적혀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렇다면 이선생 말처럼 내가 그 사실을 은폐한 거겠죠. 그런데 이선생은 이걸 확인하는 순간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말한 것처럼 이선생이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알고 싶습니까? 아니…… 그걸 알아도 괜찮겠어요?

수학은 테이블에 봉투를 올려놓는다.

수학: 래빗 헌팅을 해보실래요?

수학은 미술을 빤히 바라본다.

미술은 봉투에 시선을 고정한다.

암전.


이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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