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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람의 마음도 지나치지 않는 극작가로" [희곡 당선소감]

입력
2023.01.02 04:30

희곡 부문 당선자 이경헌

2023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자 이경헌

2023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자 이경헌

저는 월드시리즈오브포커(World Series of Poker·WSOP) 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포커 플레이어들은 상대방에게 정보를 주지 않으려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합니다. 그렇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어떤 플레이어가 어떤 카드를 받았는지 아는 상황에서 경기를 관전합니다. 포커는 정보의 불균형을 전제하는데 영상은 전지적인 시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정보를 가지고 경기를 지켜보면 미세한 변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무표정한 얼굴 이면에서 설렘과 두려움 같은 감정이 스쳐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래빗 헌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저는 연극을 보기 전에 먼저 희곡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연극의 매력은 서사를 따라가는 것보다 인물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말을 아는 것은 연극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동일한 연극을 반복하여 보는 것은 전혀 지겨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인물은 유약한 마음을 위악적인 태도로 숨기려고 합니다. 어떤 인물은 차가운 논리로 뜨거운 내면을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객석에서는 전지적인 시점에서 인물의 감정을 건너다보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연극에 빠져든 이유였습니다.

조해진 선생님께 소설을 배우는 동안에는 제 감정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조광화 선생님께 희곡을 배우는 동안에는 제 감정에서 한걸음 떨어져 관계 속에서 그것을 재인식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두 선생님께 단순하게 소설과 희곡을 배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두 분을 만나면서 사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두 선생님께 배운 것을 기억하면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람의 마음도 지나치지 않는 극작가가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래빗 헌팅’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분들과 독자분들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겠다는 예감이 들 때는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분이 들 때만큼 괴롭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래빗 헌팅’을 통해 저와 끝까지 교감을 시도해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힘든 순간마다 펼쳐보는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이 희곡이 어떤 방향으로든 마음을 움직였다면 우리는 극장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치지 않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993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 입학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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