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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는 나이 듦은 어떻게 가능한가

입력
2022.12.26 22:00
수정
2022.12.27 09:43
27면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올해 9월 8일 오전 서울역에서 한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올해 9월 8일 오전 서울역에서 한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근래에 몇몇 방송국에서 나이 듦과 노년의 삶에 관한 이야기 요청이 들어온다. 함께 하겠다고 동의한 후 받아본 질문지를 보며 '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지난 몇 년간 국가 주도형, 예산 중심 저출산 초고령화 논의만 있던 건 아닌 게 분명하다. ‘노후 준비’가 개인의 자기 계발 능력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시중에서 가장 번잡하게 유통되는 웰에이징 언설이 누락시키고 있는 시민집단이 누구인가도 꼼꼼히 따져 물어야 한다는 태도가 저변에 깔린 질문들이었다.

이 중에 서로 연결된 두 개의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다. 우선 연말이다 보니 빼놓을 수 없는 질문 하나. 나이 듦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특히 한 해가 저물어갈 때면 ‘이렇게 또 나이를 먹는구나’ 하며 허탈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떤 태도와 마음이어야 할까. 내 답변은 이렇다. 이런 심리 현상이 꼭 나이 많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해가 바뀔 때면 누구나 자신이 어떤 생애 단계를 지나고 있는지, 어떤 자기만의 의미로 그 시간을 채우고 있는지 묻는다. 시간의 존재인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마땅히 해야 하는 질문이다.

두려움은 나이 듦에 관한 문화적 해석의 얄팍함과 구멍 숭숭 뚫린 사회적 안전망 때문이다. 노르웨이 다큐멘터리 '내 나이가 어때서'에 나오는 98세 고로의 말을 인용해보자. 고로는 노년 여성들의 배구단 ‘낙천주의자들’의 최고령자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기며 그는 “새해가 또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다 줄지 흥분된다”고 말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 기대감으로 환하다. 이런 기대감의 배경은 복지 시스템과 모든 나이가 평등하게 존중받는 문화다.

다른 질문은 장애인이나 노숙인·주거약자, 성소수자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의 ‘무사히 노년 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가장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려운 만큼이나 이 질문이 모든 노년 관련 논의의 장에서 필수 질문으로 제기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다양한 연령대가 호혜적으로 연대하는 사회를 지향한다면, 나이가 복잡한 정체성의 문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장애인이나 노숙인·주거약자, 성소수자의 노후는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회에서 제대로 ‘준비’되기 어렵다. 이 사회는 모든 면에서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삶의 다양한 유대관계가 아닌 이성애 혈연 가족만을 권리와 의무를 진 친밀성 관계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사적 재산권의 물리적∙상징적 지표가 되어버린 ‘집’과 얽혀 있다. 특정 시민들의 노골적 배제를 사회 구성의 토대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무사히 잘 살며, 잘 늙으며, 잘 죽기는 ‘저들의’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배제되는 ‘이들’에게는 ‘우리’ 사회 맞나? 묻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대다수 시민의 노골적∙암묵적 동의하에 지속되고 있다. 이들이 주민으로, 시민으로 (필요하다면 국민으로), 다양하게 다른 몸으로, 다양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다양하게 다른 사연으로 엄연히 여기에 존재한다는 걸 사회 구성원들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앎이 그렇듯이 이 앎에도 성실하고 진지한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앎이 시민 되기의 필수 교과목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그 필요성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래야 ‘저들’과 ‘이들’을 분리하는 경계선이 사라지고, 모두 함께 두려움 없이 늙어갈 수 있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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