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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품점에서 뉴욕갤러리까지..100년 역사 눈앞에 둔 인사동 '통인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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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송현동에서 안국동을 잇는 ‘인사동 거리’가 한국 전통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부터다. 식민통치로 벼슬길이 끊긴 경복궁 일대 양반들이 생계를 위해 내놓은 세간살이 중 귀물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골동품 상점으로 몰려들었고, 때로는 양반들이 직접 가게를 열기도 했다.
오늘날 인사동길에서 가장 많은 골동품을 보유하고 있는 통인화랑의 전신인 통인가구점도 1924년 통인동에서 문을 열었다. 뼈대 있는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 줄 알았던 12세 소년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작한 골동품 가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한 외국인의 입소문을 타면서 한국 고미술을 알리는 문화공간이 됐다. 지금의 관훈동으로 옮겨 온 이후엔 신진 작가들의 등용문이 됐다. 전문성과 가치를 인정받은 통인화랑은 2019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10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를 지켜 온 통인화랑을 20일 찾았다.
통인화랑은 인사동길에서도 가장 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중심도로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1층의 ‘통인가게’에선 나전칠기를 비롯해 도자기와 장신구 등 각종 공예품이 방문객을 반긴다. 지하 1층과 지상 5층은 공예품과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로, 지상 4층은 골동품을 보관∙판매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계단을 이용하는 손님이 많지 않지만, 붓글씨 작품 등이 벽면에 빼곡히 걸려 있어 한 층 한 층 구경하며 걸어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이야 7층 건물이 흔하지만 건물을 새로 지어 올린 1973년만 해도 인사동 일대에서 홀로 우뚝 선 고층 빌딩이었다고 한다. 2대째 가업을 잇는 김완규 대표는 “1972년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이 가게를 방문했다가 급하게 화장실을 찾길래 하는 수 없이 동네 푸세식 변소를 알려줬는데 경악을 하던 상황이 두고두고 민망했다”면서 “우리나라 문화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공간부터 품격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건물을 새로 지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예술에 대한 김 대표의 강한 긍지와 책임감은 통인화랑을 세운 아버지 김정환씨 영향이 컸다. 미술 공부는커녕 마땅한 관련 서적도 없던 일제강점기에 가게를 차린 소년 김정환은 물건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 행상을 하던 노인을 따라다녔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유물 출토 현장을 찾아 구경했다. 그렇게 습득한 기술로 손님들에게 항시 가장 좋은 물건만 내놓았고, 직접 수리까지 했다. 그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운 김 대표가 한국 문화 애호가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직을 모토로 삼은 통인화랑에는 사람이 몰렸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을 비롯해 한국화학 설립자 김종희 회장, 중요무형문화재를 제도화하는 데 앞장선 언론인 예용해, 체이스 맨해튼 은행 총재를 역임한 데이비드 록펠러 등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한국의 대표 원로화가 권옥연은 하도 자주 가게를 드나든 탓에 “통인가게에 값을 치르려면 그림을 칠해 놓고 말릴 새도 없이 팔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1973년 가게를 물려받은 청년 김완규는 '잘나가는 골동품 가게'에 만족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소유로 그치는 골동품에 한계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우수한 공예품을 즐길 수 있어야 국가 전반의 문화예술 수준이 올라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조악한 대량 생산품에 반기를 들고 영국에서 공예운동을 일으킨 윌리엄 모리스의 이론이 김 대표의 생각과 맞아떨어졌다.
1975년부턴 이름을 ‘통인화랑’으로 고치고 갤러리를 열었다. 초기엔 동양미술품을 주로 전시하다 유행이 서양화로 바뀌자 현대미술로 콘셉트를 바꿨다. 지금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박서보가 1976년 첫 개인전을 연 곳이 통인화랑이다. 윤광조와 허건, 피에스탁만 등 국내외 작가들의 전시를 유치하면서 공예∙회화 전문화랑으로 저변을 넓혔다. 김 대표는 “지금도 작가들의 문의가 쇄도해 한 달에 두어 번씩 전시 내용을 바꿔야 겨우 소화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더 많은 외국인을 화랑에 끌어들이기 위해 김 대표가 40년간 분기에 한 번씩은 개최한 게 판소리와 오페라 공연이다. 많은 외국인과 교류하며 한국문화의 저력을 체감한 김 대표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한국 사람들에겐 인기 없는 작가라도 작품만 우수하다면 외국 시장에서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1980년대엔 홍콩에서, 2002년엔 뉴욕에서 갤러리를 열었다. 각각 15년과 8년간 운영하며 자신의 생각을 증명해 냈다. 그가 세웠던 갤러리가 이제는 ‘한국홍보대사’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다.
미술품을 잘 다루기 위한 김 대표의 노력은 관련 사업으로까지 연결됐다. 국내 최초로 포장이사서비스를 도입한 ‘통인익스프레스’가 대표적이다. 김 대표는 “과거엔 신문지로 물건을 싸서 배송했는데, 록펠러가 ‘가게 수준에 비해 포장 서비스가 뒤떨어진다’며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종이로 포장해보라고 해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해외화물수출입 업체인 통인인터내셔날과 국내 최대 규모 문서 보관 회사인 통인안전보관도 미술품을 안전하게 배송하고 보관하기 위한 김 대표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백발이 성성해진 김 대표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부친이 사용하던 통인화랑 7층 작은 사무실로 출근하는 그는 현재 인천 강화도에 아트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강화도에 변변찮은 문화체험 시설이 없다는 아쉬움에 10개 미술관을 새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김 대표는 “화랑은 돈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좋은 전시를 했다는 사실에 만족할 따름”이라며 "앞으로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우리 예술을 알리는 데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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