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철 회장과 2022년 대한민국

진양철 회장과 2022년 대한민국

입력
2022.12.1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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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막내아들. JTBC 제공

재벌집 막내아들. JTBC 제공


요즘 만나는 기업 관계자와 재계 인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TV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시청 소감을 꺼내느라 바쁘다. 그동안 재벌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드라마가 적지 않았지만 확실히 더 실감 난다고 입을 모은다. 드라마 속 순양그룹 진양철 회장 일가를 보면서 '내가 아는 누군가가 아닐까' 짐작하거나 '우리가 모르는 새 저런 일이 있었나' 하는 의구심까지 들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원작 웹소설을 쓴 산경 작가는 한국의 재벌가를 모티브 삼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배우 이성민이 연기한 진양철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고 정주영 현대 창업주를 섞어 놓았다고 말한다. 특히 경영권 승계를 그린 대목은 현실 재벌의 복사판으로 입길에 올랐다.

진 회장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노력해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에게는 혼외자 아들을 포함해 아들 셋, 딸 하나 그리고 손자 셋, 손녀 하나가 있다. '장자 승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장남과 장손에게 몰아 주지는 않는다. 첫째 아들(전자·중공업) 둘째 아들(증권·금융) 딸(백화점·유통) 등 주요 계열사를 나눠 맡기며 기회를 주지만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가차 없다. 신도시 '새 서울 타운' 개발 프로젝트를 맡겼던 장손이 결과를 내지 못하자 매몰차게 지방으로 보낸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 진도준이 나타난다. 시청자들은 배우 송중기의 연기를 통해 앞으로 전개 상황을 점치는 한편 진 회장의 조강지처 자녀들과 장손이 곤경에 처하는 장면에서는 짜릿함마저 체험한다. 혼외자식의 둘째 아들(4-2), 재벌가에서 가장 힘없고 경영권 다툼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는 그가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분당 땅을 종잣돈 삼아 부를 키우고 계열사를 사들이는 장면은 한편으로 재벌가 자제들의 무능력을 폭로하는 장치다. 특히 외동딸 진화영이 조카 진도준에게 "너는 우리와 달라. 감히 어딜 넘봐" 하며 조롱했다가 조카가 놓은 덫에 걸려 백화점 경영권을 빼앗기는 과정은 가장 극적이다. 때문에 진 회장이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도준에게 그룹의 핵심인 금융지주회사 지휘봉을 맡기려 하는 것은 먼저 능력이 있는지를 따져봤기 때문에 그럴 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현실에서 재벌가 자제들의 모습은 어떨까. 최근 잇따라 발표되는 주요 기업들의 정기 인사 명단을 보면 그룹 오너 자제들이 적잖이 포함돼 있다. 30대 임원, 40대 대표이사는 물론 1, 2년 전 승진 명단에 오른 뒤 초고속 코스를 밟는 경우도 더러 있다. 신입사원 혹은 경력직으로 입사해 숱한 시련을 이겨내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면서 경쟁에서 살아남은 '샐러리맨 신화'와는 출발부터가 다르다. 여론의 구설에 오르거나 불법행위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해도 승진에는 큰 지장이 없다. 어떤 검증을 거쳤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사람들 참 이상해요. 북쪽에서 김씨 부자가 권력을 세습하는 건 그렇게들 못 참아 하면서 남쪽에서 재벌 3세가 경영권을 세습하는 건 왜 다들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어차피 자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드라마에서 20년 전 진도준이 했던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적용해도 어색하지 않다. 진양철 회장이 2022년 대한민국에 온다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다.

박상준 산업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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