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 죽인 비정한 엄마, 그 뒤엔 20년 알고 지낸 '사기꾼' 있었다

입력
2022.12.1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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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살해 후 극단 선택 시도한 친모
이웃 사기로 전 재산 날려 죽음 선택
사기꾼, 내연녀 등에게 투자금 탕진
"가족 파괴 초래하는 사기범죄 심각"

편집자주

끝난 것 같지만 끝나지 않은 사건이 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사건의 이면과 뒷얘기를 '사건 플러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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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9일 오전 1시. 광주광역시에 사는 A(51)씨는 남편의 넥타이와 흉기를 챙겨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평소 자주 놀러 가던 전남 담양군 모처. 24세, 17세 두 딸도 함께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차량 뒷자리에 탄 A씨가 별안간 조수석에 앉아 있던 둘째 딸의 목을 넥타이로 졸랐다. 뒤이어 큰딸 역시 같은 방법으로 살해했다. 흉기는 딸들이 죽지 않을 것에 대비해 준비해 둔 2차 살해 도구였다.

첫째 딸은 덤덤히 엄마의 범행을 받아들였다. 며칠 전 “함께 죽자”는 제안에 동의한 터였다.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 둘째 딸도 처음엔 “죽기 싫다”고 버텼으나 결국 엄마의 설득을 뿌리칠 수 없었다. 세 모녀는 평소 유대관계가 깊었다. 두 딸은 숨지기 직전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했다. A씨도 곧 딸들 곁으로 가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다음 날 아침. A씨 남편은 밤새 가족들과 연락이 되지 않자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시신으로 변한 두 딸을 발견했다. 엄마는 살아 있었다.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은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A씨는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달 18일 결과가 나왔다. 법원은 살인 혐의로 그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두 딸의 기회를 박탈하고 생을 마감하도록 한 행동은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엄마를 꾸짖었다.

평범했던 가정이 풍비박산 나자 지역사회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엄마가 딸들을…”이라며 비정한 친모의 범행이 연일 입방아에 올랐다. 반전은 그다음이었다. 세 모녀의 극단적 선택 이면에 ‘사기꾼’ B(53)씨가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비극의 시작, 절친 이웃의 투자 유혹

비극은 7년 전 싹텄다. A씨는 2015년 같은 아파트 주민이자 큰딸 중학교 친구의 학부모 B씨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B씨는 “법인회사에서 일하는데 돈을 맡기면 다달이 3.3% 이자를 주겠다”고 A씨를 꾀었다.

두 사람은 20년 넘게 알고 지내던 절친한 이웃이었다. 고수익에 현혹된 A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21차례나 돈을 건넸고, 4억800만 원이 그렇게 B씨에게 흘러들어갔다. 전 재산이었다.

그러나 약속한 이자 지급은커녕 원금 상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A씨가 독촉할 때마다 B씨는 온갖 핑계를 대며 상환을 차일피일 미뤘다. A씨는 얼마 후 비슷한 피해자가 더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제야 사기를 눈치챘다. 알고 보니 B씨는 회사에 다닌 적도, 수입도 없었다.

A씨 부부는 원래 사기꾼을 형사고소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돈을 되찾겠다는 의욕보다 상실감이 더 컸다. 두 딸의 미래를 망쳐놨다는 죄책감에도 사로잡혔다. 무력한 엄마의 최종 선택은 동반 죽음이었다.

150억 뜯어낸 '두 얼굴'의 사기꾼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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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씨는 대담하게 사기 행각을 일삼았다. A씨뿐 아니라 약간의 안면만 있어도 투자를 권하며 돈을 뜯어냈다. 심지어 딸의 담임선생님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다. B씨는 2014년 딸 담임에게 “경매 직전 건물을 매입한 뒤 되팔아 수익을 얻고 있다. 돈을 주면 은행보다 높은 이자를 지급하겠다”고 속여 11억 원을 가로챘다. 또 다른 피해자에겐 “기업어음이나 무기명 채권을 거래하면서 고수익을 내고 있으니 돈을 빌려주면 월 3%의 이자를 지급하겠다”면서 무려 61억 원을 빼돌렸다.

피해자들은 혁신도시 개발, 채권, 기업 투자 등 각종 전문용어를 들먹이며 투자를 유혹하는 B씨의 화술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피해 규모는 9명, 150억 원에 이른다. 그는 가로챈 돈을 다른 피해자에게 이자로 지급하는 등 전형적인 ‘돌려막기’ 수법을 썼다. 그 많은 돈은 가족과 내연녀의 생활비로 탕진했다. 변제 능력과 의지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B씨의 범행이 오랫동안 지속된 건 화려한 언변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이미지 세탁’에도 공들였다. 2017년 관할 구청에 인재육성 장학금 명목으로 100만 원을 기탁했고, 아파트입주자대표회 회장과 주민자치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운영비 500만 원, 보건소 지원 100만 원, 미얀마 민주화운동 후원 성금 30만 원을 기부하는 등 선량한 시민으로 포장했다.

법원은 10월 B씨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사기)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A씨 가족의 비극과 대다수 피해자가 재산을 상실하는 등 회복불능의 피해를 끼친 점이 인정됐다.

이번 사건은 사기 범죄가 극단적 가족 파괴로 이어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개인의 잘못된 욕망이 여러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갔고, 급기야 죽음까지 초래한 것이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위원은 16일 “사기 피해자들이 금전적 이득을 위해 유혹에 빠진 것은 맞지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여지는 충분했다”면서 “엄마가 자식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재판부가 양형에 참작했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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