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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졌잘싸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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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는 한국인의 멘털리티를 바꾸는 일대 전환점이었다.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는 K콘텐츠의 문화적 기원을 거슬러 가면, 2002년 그해 뜨거웠던 여름과 그보다 더 뜨거웠던 거리 응원과 승리의 열광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전까지 우리가 목도해야 했던 것은 넘을 수 없는 장벽, 어찌할 수 없는 한계였다.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에서 선수들은 죽을 힘을 다해 투지를 불살랐지만, 잘한 경기라도 늘 한 끗이 모자랐다. “그 골만 들어갔더라면, 그 골만 막았더라면”이라고 안타까워하며 ‘졌지만 잘 싸웠다’고 자족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안 된다’는 뿌리 깊은 패배 의식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 당시의 ‘졌잘싸’는 열등감을 감추는 자기 위안의 정신승리였다. 이 기만을 벗어나려 해도 냉소의 늪에 빠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16강은커녕 1승도 거두지 못한 현실 앞에서 어떤 의식으로 무장하더라도 우리는 주인이 될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예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출구 없는 멘털리티의 미로를 깨버린 게 2002년이었다. 1승을 넘어 4강까지 질주한 히딩크호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숙원만 푼 게 아니라, 근대 이후 한국인의 멘털리티 밑바닥에 도사렸던 서구에 대한 선망과 질시, 패배감 등을 시원하게 뚫어낸 폭주 기관차였다. 모두가 16강에 감격할 때 “나는 아직 배고프다”는 히딩크 감독의 인터뷰는 한국인에게 이제 더 이상 절대적 한계 같은 것은 없다는 죽비나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그때 우리에겐 1승과 16강이란 현실의 결과가 중요했다. 국내 리그를 희생시키고 장기간 합숙 훈련하는 비정상적 방법이 동원됐지만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하튼 어찌할 수 없는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 결과로써의 발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0년 뒤 2022년의 월드컵은 지금 젊은 세대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2002년 이후 박지성 김연아 손흥민 등 세계적 선수뿐만 아니라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슈퍼스타를 배출했고, 국제 무대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에 올랐다. 더 이상 외국인들에게 주눅들 이유도 없고 “두 유 노(do you know) 김치” 따위의 유치한 질문을 할 필요도 없는 세대다. 이들에게 이번 월드컵이 큰 감동을 안겨줬다면 우리 때와는 분명 다른 종류의 희열일 터다.
월드컵 이후 Z세대에서 유행어가 된 ‘알빠임'(네가 강하다 해도 내가 알 바 아니다는 뜻)과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은 콤플렉스 없는 어떤 꿋꿋함이다. 애당초 자격지심이 없는 젊은 세대에겐 남이 강하든 말든, 신경 쓸 필요 없이 우리만 잘하면 그만인 것이다. 남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지 않는 그 자세, 그게 바로 주인의식이 아니던가. 짐작하건대 선수들이 그 정신을 유감 없이 보여줬고, 그에 걸맞은 실력을 보였으며, 그 실력대로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환호했을 터다. 그러므로 선수들이 브라질전에서 크게 패했다 하더라도 미안할 필요가 없었다. 졌지만 잘 싸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졌잘싸”가 자기 위안이 아니라, 당당한 도전에 대한 긍정으로 들리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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