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나라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약 4천 종의 식물이 자랍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풀, 꽃, 나무 이름들에 얽힌 사연과 기록, 연구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엮을 계획입니다.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에는 식물과 꽃이 많이 등장한다. 싱아, 파드득나물, 며느리밥풀꽃 등 수십 종의 식물이 그녀의 자전적 소설과 수필 구석구석에서 추억과 심경을 대리하며 독자와의 공감을 매개한다. 대부분 정확한 식물 이름들이어서, 그 식물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작품의 정서를 쉽게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주변의 식물 이름을 정확히 외어서 알게 되면 말을 걸 수 있게 된다는 그녀의 수필 속 글귀가 와닿는다.
우리나라에는 4,000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모든 식물엔 이름이 있고, 지역이나 쓰임새에 따라 달리 부르기도 하지만 한 가지만 쓰는 것이 옳다. 다양한 기록에 같은 식물이 다른 이름으로 되어 있으면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 종의 식물은 세계 공통의 라틴어 학명과 나라별 자국어로 된 일반명을 갖는다. 둘 다 정식 발행한 출판물에 처음 쓴 이름을 채택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나라 식물의 이름은 주로 조선식물향명집(1937, 조선박물연구회), 조선식물명집I, II(1949, 조선생물학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 문헌엔 작약, 삽주, 반하처럼 전통시대 우리나라 농서나 의학서에 기록된 이름과 책이 출간될 당시 전국에서 수집한 이름들 중에 가장 일반적으로 부르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름이 없던 식물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 일부 일본이름을 차용한 것이 있어 아쉽지만 저자들의 노력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조선식물향명집을 발간한 1937년은 일제가 중일전쟁, 내선일체, 민족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한 때라 조선인 단체에서 조선식물에 한글 이름을 붙인 자료집을 발간한 일은 얼마나 위험했겠는가?
식물의 일반명은 꽃과 식물의 특성, 언어권별 문화를 반영한다. 봉숭아를 'Touch-me-not', 미나리아재비를 'Buttercup'이라 부르듯 영미문화권의 식물 이름은 모양이나 특징을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많다. 반면 우리나라 식물 이름은 다양한 유래와 사연, 사투리나 언중에 의해 조탁된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애기도둑놈의갈고리, 홀아비바람꽃처럼 해학적인 이름이나 물푸레나무, 배암차즈기, 피막이풀처럼 용도를 짐작케 하는 이름도 많다. 동자꽃, 꽃며느리밥풀, 사위질빵처럼 사연과 전설이 있을 듯한 이름, 돌나물, 우산나물, 삿갓나물처럼 과거 배고팠던 시절 먹을 수 있는지에 집착해서 붙인 듯한 이름도 많다. 독이 있어 못 먹는 동의나물, 놋젓가락나물은 아이러니한 이름이다. 창포와 꽃창포, 하수오와 백수오(정식이름은 큰조롱)는 전혀 다른 과(科)의 식물에 붙여진 이름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이엽우피소는 넓은잎큰조롱의 뿌리를 부르는 말이다. 독이 있는 미국자리공의 뿌리를 도라지나 더덕으로 알고 먹는 중독 사고도 종종 발생한다. 투구꽃 종류의 뿌리나 싹은 한약재 초오나 부자로 쓰이지만 진하게 달이면 옛날 사약으로 쓰던 맹독성 추출물이 된다.
우리는 종종 과거 미국으로 반출된 우리식물 털개회나무가 정원용 '미스킴(Miss Kim)' 라일락 품종으로 개량되어 역수입되는 것에 분개한다. 우리나라에 흔한 개똥쑥으로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한 중국 중의학자의 노벨상 수상을 시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가치를 지닌 식물들을 미리 알지 못했던 것은 우리가 아닌가?
이제 막 겨울이 됐지만 벌써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봄이 되면 주변에 피는 꽃과 식물의 정확한 이름을 외어서 불러보자. 어느 작가의 말처럼 그들과 대화할 수 있고, 자연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뜰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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