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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기록하는 마땅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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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참담한 재난 앞에서 우리는 다짐한다. 문제는 그다음 벌어진다. 모든 취재가 윤리적이어야 할 애도의 현장이지만 매체 간 경쟁이라는 빗나간 열정이 뒤엉키면 이내 아수라가 되기 십상이다. 이태원 참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부 현장에서 벌어진 무리한 취재에 유족이 고통받는가 하면 두 신생 매체의 일방적 희생자 명단공개 논란까지 터졌다.
한국 언론은 그간 여러 국면에서 참사를 돈벌이나 자기 홍보의 수단으로 여긴다거나 재난을 선정적 비극의 무대로 취급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보도 준칙이 마련됐고, 현장 분위기가 나아졌다는 평도 있었지만, 문제는 반복됐다. 비평, 논평이 쏟아진 가운데 이를 그저 멀리서 안타까워할 수만은 없는 처지도 있었다. 언론을 향한 그 모든 업보, 불신, 딜레마가 진행 중인 가운데 현장으로 향해야 했던 숱한 저연차 기자들이다.
슬픔에 잠긴 이에게 인터뷰를 청하거나 말을 건넨다는 것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말을 거는 자체가 불온할 상황을 피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원치 않는 대화를 섣불리 시도하지 않고 곁을 지키다, 문득 유족 등이 억울함이든 답답함이든 부당한 처사에 대한 토로이든 쏟아내고 싶을 이야기가 있고 그 청자로 기꺼이 나라는 기자를 택할 때 그걸 성의껏 기록하고 담아내야 하는 난제인 것이다.
아무리 선의로 임한다 해도 이런 현장에서 기자는 개개인의 노력으로는 풀기 어려운 서로 다른 비판을 몰아 듣는 처지가 되기 일쑤다. “유족이나 사연에 집중하기보다 시스템을 짚어야 할 언론이 왜 유족 주변을 어슬렁거리냐.” “희생자와 생존자의 삶과 목소리를 제대로 다루는 기사는 왜 외신에서밖에 볼 수 없냐.” “유족들이 힘든데 취재 좀 자제해라.” 여기에 소속 매체가 가이드나 보호 없이 연신 빠른 ‘단독’을 요구하는 경우라면 상황은 더 심해진다.
문제는 이 어려운 딜레마의 해소를 적잖은 매체는 저연차 기자의 개인기에 내맡기고 당연시한다는 점이다. 각 딜레마를 앞서 정교하고 꼼꼼하게 가르치고 함께 고민하는 곳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어린 기자가 길어 올린 사실의 조각들을 낱낱으로 보도하기 바쁜 대신, 의미 있는 짜임새ㆍ플랫폼을 고민해 각 조각을 입체적ㆍ종합적으로 망라해 독자의 신뢰를 얻는 곳은 몇이나 될까.
이런 여건에서도 세간의 오해와 달리 현장에서 결코 ‘우르르’와 ‘막무가내’만 넘쳤던 것은 아니다. “곁에 서 있을 테니 혹시 언론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시라는 말씀만 드렸어요.” “혹시 불쾌하실지 몰라 긴 편지를 썼어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어요.” 슬픔을 제대로 기록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취재진들은 인간의 윤리와 선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울음을 삼키며 뒷걸음질하기도 했고, 생존자 앞에 내미는 펜과 수첩이 부끄러워 손을 떨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쉽게 혹은 일부만 본 채 “제대로 된 기사는 외신에 밖에 없다”를 외치는 동안, 그렇게 젊은 기자들이 길어 올린 목소리를 담은 기사들은 차곡차곡 쌓였다. 물론 질문의 무게를 고민하느라 전전긍긍했던 이 기자들의 눈물, 병증은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희생자, 유족, 생존자의 크나큰 고통 앞에 이런 작다면 작을 고통을 스스로 내밀 눈치 없는 매체는 없을 테니 말이다.
“힘든 분들을 더 힘들 게 한 것 같아 죄책감이 사라지질 않아요.” “아무 데서나 자꾸 눈물이 나요.”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은 바로 다른 현장에 투입돼 일의 고통을 일로 덮고 있다. 직장으로 언론 매체를 택했을 뿐 또래와 마찬가지의 높은 인권 감수성을 갖췄으며, 힘들면 몸과 마음이 다치는 게 당연한 젊은이들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은 이런 치료를 지원하는 움직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한국일보도 2020년부터 ‘취재 트라우마 심리 지원 제도’를 마련해 상담과 치료를 지원한다.
한 기자는 이태원 참사 취재 이후 무너지려 할 때마다 힘이 된다며 몇 문장에 연신 눈길을 주고 있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 챙기세요.” “진실성 있는 기자를 만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유족, 생존자 등 인터뷰에 응했던 분들에게 보도 후 온 메시지였다. 한겨레가 당사자 동의를 받아 보도한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32)씨의 글도 용기를 준다고 했다. ‘현장을 보고 들은 모두가 피해자입니다’라는 글에서 김씨는 이렇게 적었다.
“기자들은 그곳에서 같이 충격받고, 같이 울고, 유족을 안고 같이 무너졌습니다. (…) 만나 뵌 모든 기자님들, 피디님, 작가님 포함 정말 많은 분들이 어쩜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저에게 하셨을까요. 죄송하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면목이 없다는 말. 어쩌면 그대들은 3중으로 상처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보며 깊은 감사와 반성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업보를 씻고 딜레마를 푸는 일은 이 지점에서 시작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김씨의 절반만큼이라도 각 매체와 관리자들이 현장의 고통과 딜레마를 나의 일로 생각해 앞서 걱정하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내맡기지 않는다면 변화는 미약하게나마 시작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슬픔과 역사를 의미 있게 기록하는 언론으로 기능하기 위해 지당히 치러야 할 조직적 고민이 무엇인지 우리는 더 처절히 고민해야 한다. 당국의 무책임을 준엄하게 꾸짖는 것만큼이나 무거운 심정으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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