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차고에서 시작한 애플과 구글, 종이 간판을 붙인 사무실에서 출발한 아마존. 빅테크의 시작엔 세련됨은 없었지만, 열정과 기백이 가득합니다. 시작은 미약할 수 있어도, 끝은 창대할 '창업의 기적'은 꾸준히 이어지는 중이죠. 곧 유니콘으로 떠오를 수도 있는 유망 스타트업의 풋풋한 시작, 그 성공담의 프리퀄을 지금 실시간으로 만나봅니다.
'이 사람'의 이력을 보면 눈에 띄는 포인트가 여럿이다. 먼저, 그의 이름 뒤에 따라 붙는 직업은 ①미국 스탠퍼드 의대 신경과 교수.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 국적의 여성 가운데 이 대학 의대 종신 교수로 임용된 건 그가 최초다. 더 놀라운 대목은 ②의학을 전공한 적이 없다는 사실. 학부 전공부터 박사 학위까지 모두 전자공학 외길을 걸었다. 그는 ③현재 스타트업 대표이기도 하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엘비스'(LVIS)라는 이름의 스타트업을 창업해 회사를 이끌고 있는 바로 이 사람. 이진형(45) 교수 겸 대표 얘기다.
[곧 유니콘] 이진형 엘비스 대표
이 대표가 2015년 세운 엘비스는 치매, 파킨슨병같은 뇌질환 치료를 위한 플랫폼 '뉴로매치'를 만드는 스타트업이다. 그의 15년 연구 결실과도 같은 뉴로매치는 내년 출시를 목표로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이 플랫폼이 상용화하면 뇌를 전기회로도처럼 들여다보면서 질환을 치료하는 시대가 열릴 수 있다.
의대 교수 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실패하면 이력에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는데, 어떤 용기와 확신이 그를 창업의 길로 이끌었을까? 이게 궁금해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엘비스 사옥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이 대표의 창업 스토리를 요약하면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된다. ①외할머니 ②융합 그리고 ③문제풀이다.
키워드 #1. 외할머니
공학도였던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
서울과학고,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후 미국 스탠퍼드 대학원을 다니던 이 대표에게 외할머니는 고난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엉엉 울며 외할머니를 찾았고, 위로 받았다.
그런데 박사 졸업을 목전에 뒀을 때쯤 외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셨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어요. 그런데 재활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뚜렷한 차도도 없었어요." 외할머니는 그렇게 12년 여생을 병상에 계셨다.
뭐든 고장 나면 고장난 부분을 찾아 고치는 게 당연했던 전자공학도에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뇌도 회로처럼 신경망이 서로 연결돼 통신하는 구조 아닐까? 그 구조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뇌 회로도'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여태껏 뇌 회로도를 파악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뇌는 두개골로 싸여있어 접근 자체가 어렵고, 그간 뇌 연구는 의학자나 생물학자들이 해왔기 때문이다. 뇌를 회로처럼 생각하는 건 공학적 사고방식이었던 거다. "회로도가 있어야 질환의 원인 지점을 정확히 찾아 고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아무도 한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해야겠구나, 결심한 계기입니다."
키워드 #2. 융합
말처럼 쉽지 않은 융합형 인재 되기
뇌 회로를 연구해보겠다는 그의 선언은 그러나, 환영받지 못했다. 이 대표를 줄곧 지도해 온 교수는 "커리어 망칠 일 있냐"고 다그쳤고, 의학계에선 "그게 되겠냐"고 했다. 배척이었다. "신경세포 하나하나, 처음부터 다 배워야했어요. 그것만 해도 험난한데, 설득 과정도 지난했죠. 연구를 하려면 연구비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전까지 다른 분야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생소한 방식으로 지금껏 의학계에서 못 한 것을 한다고 하니까, 설득이 어려웠어요."
증명하기 위해 매일 새벽 2시까지 실험했다. 쉽게 성공할 리 없었다. 100번째 실험에서 실패했을 땐 포기할까도 싶었지만, 120번째쯤 되니 마침내 성공에 이르렀다.
그렇게 치열하게 규명한 게 뇌신경과 헤모글로빈의 농도 관계였다. 2010년 이를 담은 논문이 '네이처'를 통해 발표됐다. 그때서야 의학계에서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분야 간 융합이 혁신을 가져올 수 있지만, 그 융합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다는 걸 그가 뼈저리게 체험한 셈이다.
그 뒤 10년 넘게 개발한 플랫폼 뉴로매치가 세상에 나오면, 뇌질환 진단과 치료가 훨씬 정확해질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가령 현재는 치매 진단에 자기공명영상장치(MRI) 검사 등을 동원하고 있는데, 이런 방법으론 '뇌의 A 부분에 이상이 있으므로 치매가 생긴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A가 B, C, D 등과 연결돼 있고, 이 가운데 A-C 구간에 이상이 생겨 치매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세밀한 파악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키워드 #3. 문제풀이
풀고 싶은 문제를 찾는 것의 중요성
지칠 법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파고든 건 문제를 풀어내고 말겠다는 의지에서였다. 이 대표는 어릴 때부터 문제 푸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과학고에 갔고, 쭉 과학자를 꿈꿨다. "문제 푸는 게 좋아서 대학원에 진학할 때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떤 문제가 풀고 싶은 건지를 몰랐죠." 전자공학도가 보통 졸업 후 하는 일, 현재의 기술을 더 발전시키는 데는 딱히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더 빠른 스마트폰 만드는 일 같은 건 저한테 별로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날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풀고 싶은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가 창업을 한 이유도 같았다. '뇌질환을 해결하고 싶어서'다. 연구한 것을 실제 환자 치료에 적용해보려면, 이를 추진할 회사가 필요했다. 이미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회사가 있었다면 꼭 창업을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창업은 '양산돼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나이와 상관 없이 창업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라서다. 너무 이른 나이에 창업하면 제 때 받아야 할 교육을 받지 못하게 돼 오히려 성공 확률이 낮아질 수 있다. 이 대표는 창업을 고려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렇게 조언한다. "정확히 내가 풀고 싶은 문제가 뭔지를 찾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식이 창업인지를 고민해 보세요. 이미 그 문제를 풀고자 하는 기업에 취직해 함께 하는 것도 좋은 길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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