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은 ‘복수극 무대’

입력
2022.12.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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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지난 3일 새벽 가나전 2대 0 승리에도 다득점에서 한국에 뒤져 우루과이의 예선전 통과가 좌절되자,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스가 눈물을 흘리며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3일 새벽 가나전 2대 0 승리에도 다득점에서 한국에 뒤져 우루과이의 예선전 통과가 좌절되자,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스가 눈물을 흘리며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3일 새벽 한국이 카타르 월드컵 3차전에서 극적으로 포르투갈에 역전승을 확정한 순간, 한국 축구 팬들은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같은 조 가나와 우루과이 경기로 이목이 쏠렸다. 후반 추가시간, 2골 뒤져 있는 가나는 만회 골을 노리기보다 수비에 매달렸다. 결국 우루과이의 공격을 막아내고 동반 탈락이 결정되자, 가나 응원단은 16강전에 진출한 한국 팬과 함께 환호했다.

□ 과학자들은 복수에 나설 때 뇌에서 만족을 느끼는 등쪽줄무늬체(dorsal striatum)가 활성화하는 것을 발견했다. 복수의 달콤함은 어떤 손해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자극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8강전에서 우루과이팀 루이스 수아레스는 '나쁜 손'으로 불리는 반칙으로 가나팀의 승리를 빼앗아, 가나 국민들에게 큰 상처를 줬지만 사과를 거부했다. 가나는 대통령까지 나서 “우리는 12년간 우루과이에 복수를 기다려 왔다”고 말할 정도로 절치부심했고, 카타르에서 수아레스의 눈물을 보며 복수극을 완성했다.

□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 디에고 마라도나는 심판의 눈을 속인 주먹 반칙 골로 잉글랜드에 패배를 안겼다. 축구사에 남은 '신의 손' 사건을 통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4년 전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 패하며 쌓인 복수심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튀니지가 프랑스에 이기며, 75년 식민 지배자를 향한 울분을 덜어냈다. 경기에 앞서 프랑스 국가가 연주되자 튀니지 관중들은 호루라기를 불며 방해하며, 이 경기를 복수의 무대로 만들었다.

□ 직접 복수에 나설 기회를 잡지 못했지만, 제삼자 덕분에 복수의 달콤함을 맛본 경우도 있다. 일본이 스페인에 역전 골을 터뜨리는 순간 잉글랜드 축구 팬들이 일본만큼 기뻐했다. 이 골로 예선 탈락이 확정된 독일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전에서 잉글랜드팀 프랭크 램파드의 중거리 슛이 골라인을 넘지 못했다는 판정을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는 팬들이 일본팀 비디오판독(VAR) 장면을 SNS로 퍼 나르며 ‘램파드를 위한 정의’라고 부른다. 12년 전 억울한 판정으로 승리를 얻은 독일이 이번에는 의심스러운 VAR로 16강 진출이 좌절됐다는 조롱이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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