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입력
2022.12.01 22:00
27면
드라이브 마이카(왼쪽), 데몰리션 포스터. ㈜트리플픽쳐스·리틀빅픽처스 제공

드라이브 마이카(왼쪽), 데몰리션 포스터. ㈜트리플픽쳐스·리틀빅픽처스 제공

현실과 잠시 거리를 두고 싶을 때는 영화를 본다. '나중에 꼭 봐야지' 하면서 캡처해놓은 휴대폰 사진첩을 살피다 고른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였다. 주인공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모른 척한다. 오토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 오토를 잃을까 봐, 자기 삶이 무너질까 봐. 그런 와중 갑작스레 오토는 죽음을 맞이한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가후쿠는 말한다. "나는 제대로 상처받았어야 했어. 진실을 지나치고 말았어. 실은 깊은 상처를 받았지. 곧 미쳐 버릴 정도로.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속 못 본 척했어.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수 없었어. 그래서 난 오토를 잃은 거야."

긴 러닝타임의 영화를 보고 나니 몇 년 전 본 비슷한 내용의 영화 '데몰리션'이 떠오른다. 주인공인 데이비스는 아내 줄리아를 교통사고로 잃는다. 하지만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사람들은 아내를 잃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데이비스를 보며 수군거린다. 이때 데이비스의 장인이 말한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 이후 그는 냉장고, 컴퓨터, 화장실 문 등을 분해한다. 계속 분해하고 다시 파괴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다 아내가 외도한 증거를 만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데이비스는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다만 그 사랑에 무관심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분해하고 파괴하면서 데이비스는 자기 삶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무엇이 중요했는지를 알아간다.

두 영화는 갑작스럽게 가족의 죽음을 맞이한 이가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한 각자 상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까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이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비슷한 슬픔을 경험한 운전기사 미사키가, '데몰리션'에서는 데이비스의 아픔을 이해해주는 고객센터 직원인 캐런이다. 이들 덕분에 주인공들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진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극복해 나간다.

현실과 잠시 거리를 두고 싶었던 건, 지난 10월에 일어난 참사 때문이다. 서울의 한 거리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의 죽음이, 남겨진 이들의 상처가 너무나 죄스러웠다.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막을 수 있는 죽음을 막지 못했다.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외면하지 않겠다며 매일 관련 뉴스를 보았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회피만 하고,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이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겠다며 영화를 봤지만, 영화 속 죽음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통해서 결국 다시 참사를 마주하게 됐다.

가후쿠는 비슷한 슬픔을 경험한 미사키에게 말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말해야 한다.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많은 사람의 위로와 공감보다 같은 슬픔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의 존재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부디 하루빨리 유가족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슬픔을 나눌 기회와 공간이 주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언제든지 이들에게 마이크와 지면이 주어지길. 상실의 슬픔이 익숙해지고 조금씩 무뎌질 때까지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김경희 오키로북스 전문경영인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