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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휴전론 급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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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세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주목하는 이유는 확전(擴戰) 위험 때문이다. 불똥이 유럽 주변국으로 튀면 3차 세계대전 시나리오가 본격 작동한다. 우려가 현실이 된 경우가 지난달 15일 폴란드에 떨어진 미사일 문제였다. 2명이 희생된 사건은 하루 뒤 우크라이나의 요격미사일 오작동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사건 초기 러시아 타격으로 알려지면서 유럽 전역에 긴장이 감돌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폴란드에 대한 공격은 나토의 집단방위권을 자동 발동시킨다. 때맞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그건 증거가 아니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젤렌스키 말대로 러시아 미사일이었다면 사태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미사일 오작동 소동이 미국과 서방의 휴전론을 부상시킨 건 의외이나 자연스러운 결과다.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은 이 사건을 기회 삼아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할 가능성은 낮다”며 협상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겨울은 협상을 시작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시기까지 특정했다. 미국 정부의 기존 입장과는 다른 밀리 의장의 발언은 바이든 정부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막후 채널만 가동해오던 미·러 양국은 최근 공개적인 만남까지 가졌다. 러시아ㆍ우크라이나 평화회담이 열렸던 튀르키예에서 양국 정보수장이 만난 것인데, 휴전 협상이 타진됐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만이 아니라 개전 이래 친푸틴 입장을 지켜온 중국 시진핑 주석도 휴전을 지지하고 나섰다. 지난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시 주석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만나 휴전지지, 평화회담 촉구란 두 가지 새로운 입장을 밝혔다.
휴전협상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러시아의 위축과 우크라이나의 공세 강화란 상황변화도 큰 원인이다. 우크라이나 점령, 친러 정권 출범을 통해 유럽에 새로운 지정학을 만들려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심은 실패했다. 대신 푸틴은 루한스크, 도네츠크, 자포리자, 헤르손 등 4개 지역의 완전한 점령과 병합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 지역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호하겠다며 핵 카드까지 꺼내 보였지만 현지 상황은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고군분투하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을 수십 킬로미터 후퇴시키면서 전황은 단숨에 바뀌었다. 북동부 하르키우 반격에 성공한 뒤 지난달 남부전선 요충지 헤르손까지 장악했다. 남은 최대 격전지는 드네프르강 동쪽 루한스크·도네츠크를 포함한 돈바스 지역. 러시아의 수세 국면이 확연해진 가운데 무려 1,000km에 걸친 전선에서 양국은 하루 100차례의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러시아는 지금까지 빼앗은 땅 절반이 넘는 55%를 넘겨줘야 했다. 여기에 탄약, 무기 보급 문제를 풀지 못하면서 상황은 여전히 불리하다. 보유 탄약의 3분의 2를 소진했으며 오래된 순항미사일에서 핵탄두를 빼낸 뒤 공격무기로 사용하고 있다고 할 정도다.
그렇다고 젤렌스키가 전쟁을 오래 끌 상황은 아니다. 외부 지원으로 버티는 우크라이나가 돈바스 지역까지 탈환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핵을 가진 러시아를 상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둘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여기에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은 유럽은 고물가, 경제난으로 한계에 몰려 있다. 다가온 겨울 추위까지 감안하면 전쟁이 길어질수록 우크라이나가 가진 장점은 상쇄되기 쉽다.
휴전 협상을 위한 푸틴과 젤렌스키의 기싸움은 이미 시작됐다. 젤렌스키는 G20 정상회의 화상연설을 통해 점령지의 반환과 러시아군 철수 등 평화협상을 위한 10대 조건을 선제 제시했다. 러시아가 동의하기 어려운 조건들인 만큼 협상이 재개된다 해도 성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러시아의 점령지 4곳 강제병합 이후 푸틴과는 더 이상 협상하지 않고 그 후임자와 대화하겠다던 젤렌스키로선 한참 물러선 것이다. 10대 조건을 공개한 다음 날 젤렌스키는 푸틴이 서방국가들을 통해 직접적인 협상을 원한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공개했다. 푸틴과 젤렌스키의 직접 협상 가능성이 처음으로 생긴 것이다.
두 당사국의 휴전에 대한 입장은 원칙론에 머물러 있다. 침공당한 우크라이나가 초강경인 것은 어쩔 수 없다. 러시아 점령지의 탈환, 러시아군 철수 없이 휴전도 없다는 입장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합의된 국경선 존중 역시 오래된 요구 사항이다. 여론 역시 크림반도를 포함한 점령지 반환을 전제하고 있다. 러시아로선 배수의 진을 치듯 협상마저 금기시하는 우크라이나 분위기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불리하지 않은 전황은 비현실적 주장에도 힘을 싣는 형국이다. 총사령관인 잘루즈니는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고는 어떤 협상도 받아들이기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전개되기 어려운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독자 전쟁수행 능력이 부족한 여건에서 세계의 협상 요구를 외면할 순 없다. 승리를 원할수록 희생을 강요받는 국민들도 어느 시점에 지도자의 결단을 촉구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이번 전쟁을 서방과의 갈등, 우크라이나를 앞세운 나토의 동진 위협에 대한 안보적 대응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우크라이나 점령지를 돌려줘선 안 된다.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4개지역 병합이 러시아엔 최소한인 셈이다. 그렇지 않으면 푸틴은 전쟁의 패배자가 되고, 이는 푸틴과 권력 엘리트들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걸 의미한다. 특히 푸틴 체제 정당성의 근거인 경제적 성과가 전쟁과 서방 제재로 사라진 것도 푸틴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입장은 전쟁 초기와 달라진 게 없다. 무기와 경제, 인도적 지원을 지속하나 우크라이나 방어를 위한 군대 파견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휴전에 대한 기대는 높고 이해관계 또한 크다. 헬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2014년 크림반도 사태처럼 이번에도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 양보하고 휴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찌감치 편 바 있다.
미국 백악관은 휴전은 우크라이나가 결정할 사안이고, 러시아가 영토 야욕을 버려야 협상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지원 부담이 커지면서 ‘휴전’이 국내 정치에 소환돼 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이 “휴전 협상 창구를 닫지 말라”며 우크라이나를 설득 중이란 보도가 나왔다. 선거 이후 러시아의 헤르손 철군 선언이 나오자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겨울 동안 모든 당사자가 자신의 입장을 재조정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라며 타협 추진을 예고했다.
전쟁비용 승인 권한이 있는 미 의회에서도 휴전 요구의 목소리가 높다. 민주당 의회진보모임(CPC) 소속 의원 30명은 10월 말 바이든 대통령에게 휴전 촉구 서한을 보냈다. 나중에 일부 의원이 철회했지만 행정부 정책에 입장 반영을 요구하는 방식인 서한에서 의원들은 “절망적일 수 있는 위험을 감안할 때 전쟁 장기화를 막는 것이 우크라이나와 미국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차기 하원의장으로 유력한 공화당 원내대표 케빈 매카시는 “우크라이나에 백지수표를 쓰지 않겠다”며 지원 축소의 뜻을 분명히 했다.
국제사회 분위기와 국내정치를 감안할 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휴전 논의는 결국 점령지 반환 문제가 최대 현안일 수밖에 없다. 이전에도 양국은 이 문제로 협상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 자국 이해에 기초한 원론이 부딪히는 문제에서 어느 한쪽이 패배하는 형태로 전쟁을 끝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서방이 나서 크림반도에 이은 돈바스 일부 지역을 러시아에 떼주는 식의 협상을 강요하기도 어렵다. 이처럼 서로 물러서기 힘들다면 점령지 처리를 미래로 미루고 협상하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마이클 오헨런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휴전시 우크라이나는 푸틴이 물러난 뒤 다음 지도자와 영토반환 협상을 벌일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로선 어느 경우이든 휴전 협상이 지정학적 샌드위치의 비극을 확인하는 절차가 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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