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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가난에 박수 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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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함민복 시인의 '박수소리'는 가난했던 유년 시절을 회고한 자전적인 시다. 시의 화자는 구령대에 올라 전교생 대표로부터 '불우이웃'에게 주는 라면 박스를 전달받는다. "라면 박스를 껴안은 채, 슬로비디오로, 쓰러진 오, 나의 유년!! 그 구겨진 정신에 유리조각으로 박혀 빛나던 박수소리, 박수소리." 화자가 가난의 징표를 짊어지는 순간을 찍는 사진기의 셔터 소리, 등 뒤로 쏟아지는 친구들의 박수 소리가 따갑다.
세상은 가난한 사람을 그냥 도와주는 법이 없다. 1962년생인 시인이 학창 시절을 보낸 197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TV 속 모금 프로그램을 보자. 생활이 어려운 이웃의 집안 사정을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미성년자인 자녀의 얼굴과 신상이 공개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구호단체가 모금활동을 위한 사진이나 영상에 대역을 쓰기 시작한 게 몇 년 안 됐다. 도움이 필요한가? 당신의 가난을 만인 앞에 증명하라. 미디어의 잔인한 속성이다.
김건희 여사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캄보디아의 14세 소년과 찍은 사진이 2주 넘게 논란이 되고 있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라는 용어로 촉발된 정쟁은 촬영 당시 조명 사용 여부의 진실 공방으로까지 번지는 중이다. 빈곤 포르노는 1981년 덴마크 인권운동가 요르겐 리스너가 처음 사용한, 세계적으로 이미 통용되는 용어다. 단어의 기표에 집착하기보다 기의에 주목해서 미디어가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을 되돌아보는 게 이번 사안의 핵심이어야 한다.
국내 NGO 단체 연합인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가 제정한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은 "아동과 보호자를 무기력한 수혜자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능동적 주체로 묘사할 것"을 권고한다.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한 모금이라면, 흙바닥에 쓸쓸히 앉은 아동의 모습 대신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아동의 목소리를 들려주라는 의미다. 한국 나이로 중학생인 소년을 안아 들은 김 여사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울뿐더러 이 같은 윤리 기준에 미달된다.
구호 단체의 사진 속, 빈곤과 질병을 겪는 위기 아동들의 국적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한정돼 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캄보디아는 국내총생산(GDP) 세계 99위의 가난한 동남아시아 국가다. 이런 이미지가 반복되면 특정 지역이나 인종이 선진국의 원조에만 의지한다는 편견이 강화된다. 미디어로 접하는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생활 반경과 멀수록 무감각해진다는 것도 문제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은 연결 고리가 느슨한 타인의 불행은 나의 안전을 확인하는 방식("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으로 소비된다고 지적한다.
김 여사는 대통령실이 공개한 영상에서 "아유, 이렇게 착한 애들이", "엄마가 계속 울어서 내가 마음이 너무 아팠어"라며 연신 안타까워한다. 일회성 연민을 넘어 문제의 구조적 원인과 해결 방법을 고민하는 것까지가 사회지도층의 책무다. 지난해 한국의 국민총소득(GNI) 대비 공적개발원조(ODA) 비중은 0.16%로, 29개 회원국 평균(0.33%)의 절반도 안 된다. 나아가 이번 논란을 계기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 프로그램만이라도 아동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자리 잡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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