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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 딸의 분투를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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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 영어 좀 가르쳐줘."
소위 영포자(영어 포기자) 딸이 갑자기 영어 타령을 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를 하는데 아무래도 영어가 발목을 잡는 모양이다. 자격요건이 부족하기도 하고 서류심사나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하는 모양인데 이제 시작이라지만 아무래도 초조하고 불안한 모양이다. 오죽하면 이제 와서 영어 타령을 할까. 1980년대 중후반만 해도 대학 동기들은 다들 쉽게 직장을 잡았던 것 같은데, 보아하니 딸은 친구들끼리 서로 소개서를 검토해 주고 동영상으로 면접 공부를 하고 줌으로 면접 스터디까지 하는 모양이다. 그만큼 취업 요건이 까다롭고 길이 좁아졌다는 뜻이리라.
그동안 딸을 볼 때마다 한편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곤 했다. 딸은 정확히 4·16세대다. 고등학생 때는 또래들이 수학여행 도중에 비극적 참사를 당하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코비드(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학창시절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다. 얼마 전 정부의 무관심과 무책임 탓에 무고한 젊은이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역시 딸과 비슷한 또래들이다. 취업률은 매년 최저치를 경신하고(2021년 대학생 취업률은 65.1%로 10년 내 최저이나 그나마 비정규직이 3분의 1 수준이다.) 부동산은 치솟을 대로 치솟아 집을 구하지 못해 결혼을 못 한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식민지나 전쟁 와중이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세대가 아닐까 싶다.
취업 문제라면 여성이 더 심하다. 남녀 대졸자의 취업률 격차는 매년 커가기만 하고 남녀 간의 임금 격차도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1년 여성근로자의 평균임금은 남성의 64.6%에 머물고 있다. OECD 평균은 12.5%였다. 어디 그뿐이랴. 이른바 '미투' 운동으로 막 기지개를 켜던 여성 인권 운동이 난데없는 '백래시'를 맞더니 '구조적인 불평등은 없다'던 분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부작용도 심각하다. 이제 여가부가 폐지되고 교과서에서 '성평등' '성소수자' 같은 용어들까지 빼버린단다. 딸이 용케 취업의 기회를 잡는다 해도 지금보다 더욱 심각한 성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리고 유리천장은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말로야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라지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약자들이 딛고 선 발판마저 빼버리면 그게 어디 공정이고 경쟁이겠는가. 약자를 향한 배려가 결여된 공정은 특혜에 진배없건만 이 사회는 그 특혜마저 가진 자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있다.
"아빠, 떨어질 때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데 그때마다 나한테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해내야지. 아니면 어떡할 거야?' 그럼 조금 힘이 생겨." 친구들도 대부분 비슷하단다. 힘들 때마다 나름의 주문을 만들어 습관처럼 읊조린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만 더욱 애잔하다. 저 잘난 기득권자들처럼 재산이라도 한몫 떼어주거나 그럴싸한 직장에 청탁이라도 넣고 싶건만 나같이 가난한 글쟁이한테 그럴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거기에 이런 세상을 넘겨준 데 대한 미안함까지… 요즘 딸 볼 면목이 없다. 이 차별과 혐오의 시대, 고생하는 딸에게 아빠라고 해줄 거라곤 알량한 말 한마디가 고작이다.
"너무 걱정 마라. 언젠가는 되겠지. 아빠가 2년 동안은 공짜로 밥해주마. 그럼 굶어 죽지야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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