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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는 1시간 일찍" "아침 8시 회의"... '직장갑질'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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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1. "업무시작 10분 전까지 업무준비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중견 식품업체 A사가 지난달 일부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A사의 정식 노동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하지만 늦어도 오전 8시 50분에는 출근해 업무 준비를 한 다음, 오전 9시가 되면 바로 일을 시작하라는 공지가 내려온 것이다. 실제 A사는 10분 전 출근을 지키지 않은 직원을 대상으로 '근태 불량자' 명단을 만들어 공유하기도 했다. 한 직원은 22일 "10분 전 출근도 한 달이 쌓이면 200분을 넘는데 무급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2. 가전업계에 종사하는 B(28)씨도 지난해까지 정식 출근시간(오전 9시)보다 20~30분 일찍 출근했다. 오전 8시 50분부터 전 직원이 모여 아침 조회와 함께 국민체조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내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북한도 아니고 무슨 체조냐" "지금이 1970년대냐"는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올해부터 회사 차원의 조회·체조는 사라졌다. 하지만 B씨는 "여전히 각 팀 단위에서는 정식 출근 10~20분 전에 회의를 소집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면 팀장들은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한다"고 푸념했다.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정식 노동시간 이전에 업무 준비를 이유로 조기 출근을 강요하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A사처럼 대놓고 '일찍 출근하지 않으면 인사고과나 업무평가에서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는 게 가장 일반적 방식이다. 일찍 회의를 잡거나, 오전 9시 정각에 일일 보고를 요구하는 등 반강제 조기 출근을 강요하는 '꼼수'도 적지 않다고 한다.
조기 출근에 가장 무방비로 노출된 이들은 신입 사원이다. 수도권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입 간호사 김모(27)씨는 교대 근무시간보다 최소 1시간 일찍 출근한다. 가령 오전 7시~오후 2시 30분 근무면 오전 6시까지 출근해야 한다. 그는 "전임 근무자인 선임이 해야 하는 환자 상태 확인 등을 신입이 1시간 일찍 출근해 떠맡는 구조"라며 "업무 숙련도가 낮아 조금 일찍 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지만, 본질은 선임이 업무를 떠넘기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지방의 종합병원 간호사인 30대 전모씨 또한 "막내는 1시간 일찍 와 사무실을 청소하고 체온계, 응급약품 등의 수량을 세는 작업을 하는 '꼰대' 문화가 있다"고 털어놨다.
아침 일찍 회의·세미나 등의 일정을 잡는 방식으로 조기 출근을 유도하는 회사도 있다. 중견 식품기업 C사는 매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사내 교양 강좌 형식의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30대 김모씨는 "출근 '갑질'이나 다름없다"고 일갈했다. 컴퓨터 용품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고모(29)씨는 "매주 월요일 아침은 임원 회의가 있어 오전 8시까지 1시간 일찍 출근해야 한다"면서 "회의는 근무시간에 하는 것이 상식 아니냐"고 푸념했다.
대형 건설사에서 일하는 정모(33)씨는 근무 시작 시간이 오전 7시인데, 아침 조회 때문에 오전 6시 30분까지는 출근해야 한다. 그는 "매일 30분 초과근무 내역을 기록해놨다가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했다. 한 외국계 금융사의 과장급 직원 이모(36)씨의 경우 오전 9시 출근과 동시에 일일 보고를 받는 상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직원들과 함께 30분~1시간 먼저 출근한다. 이씨는 "매주 5시간씩, 1년(52주) 260시간을 무급으로 일하는 셈"이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공기업에서 일하는 박모(36)씨는 사적인 일을 보려고 자발적으로 일찍 출근했다가 낭패를 봤다. '지옥철'이 싫어 1시간 일찍 출근해 사무실에서 아침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화장실도 갔다 오는 등 여유 있게 하루를 시작하려는데 언제부터인가 상사가 업무 지시를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한 것. 그는 "요즘엔 회의실 같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숨어 있다가 출근 시간 맞춰 사무실로 들어간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공무원 이모(28)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는 "평소 오전 8시 40분쯤 출근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데 어느 날 상사가 '일찍 출근했으면 일을 해야지, 왜 자꾸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냐'고 하더라"면서 "우리나라 상사들은 근무시간 개념부터 잘못돼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직장 상사들도 할 말은 있다. 한 식품 유통기업의 팀장급 직원 전모(40)씨는 "직원 한 명이 오전 9시 딱 맞춰 출근해 커피를 사러 갔다가 늘 15분 뒤에 일을 시작하길래 '그런 건 10분 일찍 출근해서 다 끝내라'고 꾸짖었다"며 "근무 시작 시간에 '땡' 하고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게 꼰대냐"고 반문했다. 대기업 부장급 직원 김모(47)씨도 "20~30분 전 자기 자리에 앉아 그날의 업무 계획을 점검하는 게 직장인의 기본 도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례는 미리 업무 준비를 하는 시간도 노동에 해당한다고 못 박았다. '칼출근'을 해도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전문가들도 회사의 강요로 인한 조기 출근은 엄연한 노동시간에 포함되는 만큼 수당을 청구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직장갑질119의 장종수 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는 "만약 회사가 일찍 나오라고 지시를 하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보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사가 ①소정노동시간(노사가 미리 정한 노동시간)보다 일찍 출근할 것을 요구하고 ②이를 어길 시 인사고과에 반영하거나 임금을 감액하는 등의 불이익을 주는 경우 조기 출근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해 연장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2016년 창원지법 김해시법원은 마트 제과·제빵팀 소속 계약직 노동자가 매일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제빵 작업을 수행한 것에 대해 "노동을 제공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사측에 연장 노동수당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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