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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와 확신이 만날 때

입력
2022.11.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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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추모공간에 최민지씨가 기부한 국화 박스가 놓여 있는 가운데 추모객이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추모공간에 최민지씨가 기부한 국화 박스가 놓여 있는 가운데 추모객이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무엇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자는 모두 어리석다.” 쇼펜하우어의 독설이다. 그의 팬도 아니고 염세주의자도 아니지만 이른바 언론인으로 살면서 자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서늘한 문장이다. 복잡한 사회 현상과 타인의 삶을 몇 줄의 언문으로 치환할 때 나 자신이 가장 많이 범했고, 범하기 쉬운 오류인 탓이다. 나름의 성실한 검증을 거쳤다 자부한다 한들, 기사나 칼럼은 느긋한 확신에 그친 경우가 적지 않았고 모든 게 무지의 고백이었던 것만 같아 가끔은 몸서리가 난다.

언론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그래서 자주 고역이다. 고역이어야 한다. 급히 모은 사실의 조각들은 기어코 사회적 · 정치적 메시지가 되고야 만다. 그래서 공표되는 것은 조잡하지 않은 총체적 진실에 가까워야 하나 상황이 늘 여의치는 않다. 누군가를 공론장 한가운데로 불러내야 하는 민폐도 수반된다. 불려 나오는 사람은 주로 부당한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싶었을지언정 결코 공인이 되고 싶지는 않은 시민들이다. 출판을 앞두고 자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게 진실에 가까울까. 어쩌면 다칠지 모르는 누군가를 충분히 보호하고 있을까.

“괜찮다고 했었던 건 아는데, 제 이름 좀 빼주세요.” “가명으로 나가긴 했는데, 성씨까지 바꿔주세요.” 기사에 찰나라도 등장했던 시민이 이런 요청을 해올 때도 어려움을 절감한다. ‘신뢰받고 싶다면 실명 보도가 옳다’는 기본을 새기더라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요구다. 당하고 보면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되는 게 때론 형벌에 가깝다는 당사자의 호소에 공감하는 탓이다. 한국사회 공론장에선 일방적 피해자도 미담기사의 주인공도 익명의 비평가들에게 날 선 악담을 받는 일이 의외로 흔하다.

두 신생 매체의 ‘이태원 희생자 명단 공개’ 사태를 바라보며 그간 사무쳤던 회의감을 거듭 떠올렸다. 보도의 배경이 된 선의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참사 국면에서 희생자를 굳이 ‘사망자’라 칭하는 등 정부 역할이 미심쩍었다는 점에도 동감한다. 하지만 매체 측의 이런 해명은 ‘시민언론’과 ‘탐사언론’이라는 자칭을 꽤 무색하게 만드는 듯하다. "명단 공개가 우리 자신의 완전한 확신과 빈틈없는 준비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고 감히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유족들의 심경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충분했느냐에 대해 감히 그렇다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유족 취재를 왜 생략했나. 왜 그리 조급했나. 문제를 알고도 왜 감행했나. 쏟아지는 이런 질문에는 “언론의 책무”와 “시민들도 한마음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답을 내놨다. 선의와 믿음의 결과였으니 이해받아야 마땅하다는 취지로 읽혔다. 해명을 읽다 그들이 한 번쯤 떠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코 이런 방식으로는 공적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을지 모를 유족의 얼굴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살얼음 위를 걷는 긴장감으로 현장을 지키는 까마득히 어린 후배 기자들의 얼굴을 말이다. 현장을 지키는 기자들은 전에 없는 긴장감으로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있다. ‘재난 보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뭔가 질문하는 일 자체가 무례한 상황은 아닐까.’ ‘그래도 확인해야 한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윤리적인가.’ ‘결과물 탓에 누군가 난처하진 않을까.’ 말 그대로 '언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고역을 마다하지 않는 중이다. 이 모든 고역과 의심을 건너뛰어도 좋을 확신의 선의와 정의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의심스러울 수밖에는 없다.

김혜영 커넥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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