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제빛은 가을부터 나온다

입력
2022.11.18 22:00
23면
서울 성동구 서울숲. 뉴시스

서울 성동구 서울숲. 뉴시스

11월은 학술대회의 기간이다. 이는 곧 11월이 가장 바쁜 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학회에서 11월에 일제히 학술대회를 열기 때문이다. 연구자로서 학술대회 참여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연구의 최신 경향을 알 수 있을뿐더러 연구에 대한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연구를 발표하는 기회를 갖기도 한다. 이는 연구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논문 발제를 결심하면, 가을의 단풍 구경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다. 나의 경우에 연구란 것은 언제나 그 결과가 부족한 작업이라 그러하다. 그런데 나는 올해 들어서 단풍 구경을 제대로 못 해본 것이 몹시도 억울했던 것 같다. 일부러 경상북도 경주에서 열리는 한 연구회의 워크숍에 참가했던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다 문득 내가 언제부터 단풍 구경을 좋아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가만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거기에는 故 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이라는 책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가을의 심판'이란 제목의 글에서였는데, '여름 내내 녹색을 함께하던 나무들이 가을에 각자 구별되기 시작한다'는 내용에 매료된 것이 계기였다. 단풍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가 무척이나 근사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사실, 나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좋아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일관성 있게 공부를 하지 않았다. 당연히 학창 시절의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꼴찌를 안 한 것이 다행일 정도로 열등생이었다. 하지만 겁이 많아서 소위 말하는 문제아는 되지 못했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땡땡이도 칠 줄 몰랐다. 대신 매일같이 하이틴로맨스 책을 두 권씩 읽어야 했다. 그것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남들보다 뒤늦은 나이에 박사과정을 밟을 때 나는 왜 어려서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숱하게 고민을 해보았는데, 결론은 동기가 없어서였다. 다시 말하자면 학창 시절 나에게는 공부해야 할 마땅한 동기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공부해야 할 마땅한 동기가 있지만, 체력이 따라주지를 않는다. '공부도 때가 있다'는 말이 매일같이 새삼스럽게 다가올 정도로 체력이 좋지 않다. 그래서 가끔씩 상상을 해본다.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내 인생은 지금보다 나아졌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인생이 나아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나는 결코 없을 것 같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학력 콤플렉스가 주효하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목요일, 전국에서 일제히 대학수학능력시험이 거행되었다. 지금쯤 수험생들은 결과와 상관없이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낼 터이다. 한 수험생이 뉴스 인터뷰에서 '12년을 오늘을 보고 달려온 건가 싶어서 아쉬움도 없지 않다'고 하는데 마음이 짠했다. 올해 응시한 45만여 명 모든 수험생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n수생이 강세란 뉴스 분석을 보니, 벌써부터 재수를 마음먹은 학생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부디 바라건대 대학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여름엔 초록의 동색이던 나무가 가을이 돼서야 제각각 제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기 때문이다.


윤복실 서강대 미디어융합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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