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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는 일본에서 왜 화제가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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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파친코'는 일본에서 왜 화제가 되지 않았나?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씨의 베스트셀러 소설 '파친코(Pachinko)'가 올해 상반기 애플TV의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어 꽤 화제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자이니치 코리안’의 굴곡진 삶을 그린 원작 소설도 완성도가 높았지만, 오락성과 대중성을 적절하게 버무려 낸 드라마도 수작이어서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동포(‘민단’이라고 줄여 부르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계열 거주자)와 북한 국적의 조선인(‘총련’이라고 줄여 부르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열 거주자)을 아울러 ‘자이니치 코리안’이라고 부른다. 소설 '파친코'는 소위 ‘민단계’와 ‘총련계’가 구분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인 만큼 이 글에서는 이 호칭을 그대로 쓰겠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유독 일본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일본을 배경으로 제작된 미국 드라마인 데다, 일본에서 지명도가 높은 한류 스타가 주연급으로 출연했는데도 큰 화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애플TV의 구독자가 적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역시 애플TV 구독률이 낮은 한국에서는 드라마가 꽤 화제가 되었다. 한국인 혹은 한국계 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한국어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을 가능성도 있겠다. 하지만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가 매우 친숙한 콘텐츠로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역시 결정적인 이유는 아닐 것 같다. 아무래도 이 드라마가 일본 사회의 얼룩진 과거사를 정면에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 같다.
소설 '파친코'는 2017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그해 전미도서상 픽션 부문의 최종 후보작에 올랐고, 뉴욕타임스 등 주류 미디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앞서 드라마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고는 썼지만, 2020년에 원작 소설이 일본어로 번역, 출간된 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꽤 회자되었다. 실은 번역서가 출간되기도 전에 영문학을 가르치는 한 일본인 동료가 학생들과 함께 이 소설을 원문으로 읽는 중이라고 말해 준 적도 있었다. 그녀는 차별받는 자이니치 코리안의 현실을 젊은 층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한국인인 내가 당연히 이 소설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인데, 사실 나는 그 소설이 미국에서 화제라는 사실을 처음 들었기 때문에 머쓱했던 기억이 난다. 이 동료 교수처럼 젊은이들에게 부정적인 역사와 부끄러운 과오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양심적인 기성세대가 일본에도 적지 않다. 하지만, 폭넓은 취향의 대중에게 소구하는 드라마 '파친코'가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역시 의미심장하다. 부정적인 과거사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이 옅다는 의미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과 차별로 얼룩진 근대사에 대해 잘 아는 일본의 젊은 층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역사수정주의란 무엇인가?
지난달 29일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의미 있는 주제의 국제 학술 행사가 열렸다. “글로벌한 이야기로서의 ‘파친코’: 자이니치의 표상과 식민주의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국제 심포지엄으로, 일본 사회에 팽배한 ‘역사수정주의 (historical revisionism)’의 위험성을 비판하는 취지의 행사였다. 다행히 온라인 참가가 가능해서 나도 발표와 토론을 경청할 수 있었다.
역사수정주의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기존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재해석하려는 관점이나 사상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특히 제국주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사고방식, 전쟁과 차별 등의 역사적 과오를 부정하는 태도로 불거지고 있는데, 우익 정치 세력의 왜곡된 역사 인식과 맞물려 존재감이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 한일 간 외교 갈등으로도 번진 전시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 노역 피해자에 대한 역사 인식 문제도 자주 거론되지만, 역사수정주의로 인해 지금도 지속적 피해를 입고 있는 당사자는 자이니치 코리안이다. 식민주의와 전쟁, 차별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그들의 고통을 부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허무맹랑한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이니치 코리안에 대한 혐오나 차별적 발언(헤이트 스피치)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이 심포지엄에는 역사학자나 미디어 연구자뿐 아니라, 직접 차별과 혐오를 경험해 온 자이니치 코리안 출신의 작가와 연구자도 토론자로 나섰다. 드라마 '파친코'가 외면당하는 상황이 일본 사회에 팽배한 역사수정주의의 그림자라는 것이었다.
한편, 드라마 '파친코'가 자이니치 코리안의 실상을 왜곡하거나 선입견을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한 발표자는 “당사자들에게 이 드라마는 일종의 판타지”라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역사와 차별받는 현실을 묘사한 노력은 인정하지만, 그 속에서 그려진 모습에 이질감도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이니치 코리안 공동체에서 교회나 목사가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 설정이나, 드라마 속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미국에 대한 동경 등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그런 서사는 자이니치 코리안보다 재미교포의 정서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는 예리한 지적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은 대체로 이 드라마의 진정성을 인정했다. 편견이나 선입관을 조장할 수 있다는 부정적인 효과가 있을지언정, 차별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현실을 개선하는 노력이다. 당사자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이런 심포지엄이 마련된 것 역시, 이 드라마의 긍정적인 효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왜곡되는 역사,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는 정치적 논쟁의 소재에 불과했던 역사수정주의가 이제는 일본 정계를 움직이는 사상적 축으로 부상했다. 대중문화 콘텐츠 역시 이런 부정적인 흐름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영화나 드라마, TV 프로그램 등 다양한 교양, 오락 콘텐츠가 앞장서 자국의 역사를 미화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쟁적인 소재를 피한다’는 명분 아래 부정적인 역사와 차별받는 이들에 대해 침묵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대중문화 콘텐츠가 역사수정주의를 부추기는 힘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젊은 세대가 자기 나라의 역사적인 과오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그들만의 탓이겠는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애국주의를 자극하는 우익 정치 세력과 발맞추어, ‘의도치 않게’ 역사 왜곡에 가담하는 대중 콘텐츠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가 역사에 대한 올바른 문제의식을 갖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에서도 역사는 대중문화 콘텐츠의 단골 소재다. 역사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 등은 고증이 부실하다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고, 교양을 표방한 TV 예능 프로그램이나 동영상 공유 사이트 등에도 역사를 다루는 콘텐츠가 범람한다. 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미디어 연구자로서 역사를 다룬 콘텐츠에서 문제를 발견할 때가 적지 않다. 애초에 기획이나 편집의 방향성이 어긋나 있기도 하고,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과장하거나 일반화하는 경우도 많아서 자주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대중문화 콘텐츠와 결탁한 역사수정주의가 과연 일본만의 문제일까? 우리 사회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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