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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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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 첨단의 감수성에 수여해 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5번째 주인공을 찾습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조경란의 여덟 번째 소설집인 '가정 사정'은 인물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한다. "정미는 카키색 니트의 양쪽 소매를 뜯어냈다"(가정 사정) "기태는 평소에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내부수리중) "수요일 저녁에 동미는 이웃의 전화를 받았다" (이만큼의 거리) "인주는 백화점 지하의 건강보조식품 매장에서 일했다"(개인 사정) 등등. 첫 문장에서 작가는 이 소설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선명히 말해준다. 한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겠다고. 그 한 사람을 놓치지 않겠다고.
소설집 '가정 사정'을 읽는 동안 나는 작가가 2004년도에 발표한 '나는 봉천동에 산다'라는 단편의 어떤 대화가 계속 떠올랐다. 그 단편은 봉천동에 사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인데, 부녀는 옥상에서 달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저 달을 들어내면 하늘에 무엇이 남겠냐? (…) 너는 작가가 아니냐, 모든 사람의 생애는 구멍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니라. 그 구멍을 오래 들여다보너라." 아버지의 말에 딸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버지, 전 어느 땐 양말이나 신발 신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때 딸은 봉천동에서 태어나 봉천동을 떠난 적이 없는 서른 중반의 소설가였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났고, 이제는 봉천동에서 태어나 봉천동을 떠난 적이 없는 50대의 소설가가 되었다. 그 세월 동안 작가는 아버지의 당부 대로 구멍을 오래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구멍의 성질이란 보면 볼수록 커지고 깊어지기 마련. 거기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 아득함에 같이 아파하기 위해서 작가는 양말을 신는 걸 다시 배우는 마음을 늘 되새겼을 것이다. 그 세월 동안 인물들도 작가와 함께 나이가 들었다.
아내와 아들을 불시에 잃은 부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가족을 둔 자살생존자들, 성폭력과 가정폭력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여성들. '가정 사정'의 인물들은 치유되지 못한 오랜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간다. 상처를 잊은 듯 살아가다 문득 찾아오는 아픔을 작가는 섬세하고 사려 깊은 눈길로 보듬어준다. 이것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작가는 단정하고, 우아하고, 정교한 문장으로 말해준다.
소설가란 그저 누군가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가만히 헤아리는 사람일 뿐이라는 걸 조경란은 26년 동안 묵묵히 보여주었다. 이 작품집을 펴내며 작가는 "소설이 어떤 이상(理想)이었다면 이제 소설은 생활(生活)이 되었다"고 말한다. "잘 써야지, 좋은 걸 써야지, 하는 마음도 사라진" 생활. 이제 나는 조경란의 다음 소설이 너무나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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