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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의 뫼비우스 띠 같은 시선, 문득 그림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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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그림을 감상하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시적 화자'를 찾는 것이다. 시적 화자 또는 시적 자아란 시에서 시인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 시각 예술에서 창작자를 대신하는 목소리는 작품 속 인물이나 사물을 통해 드러난다. 미술 작품을 창작자 중심으로 작가의 의도를 분석하는 것을 '작가주의 분석'이라고 한다. 그림을 보는 감상자는 창작자가 꺼내 놓은 수수께끼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무엇을 보았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을 연습 문제처럼 풀어보자.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며 숱한 오마주를 낳은 이 작품은 17세기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정작 벨라스케스 자신은 이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다가 1834년 프라도 미술관에 보관되면서 처음으로 '시녀들'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 작품 제목은 곧 주제로 인식되지만, 이 작품은 그 제목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공주를 그렸으나 공주의 초상화도 아니고 화가 자신을 그렸으나 자화상도 아니며 왕가의 가족이 등장하나 왕가의 가족화도 아니다. 작가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상황을 공들여 구성하고, 인물의 시선에 목적을 가지고 연출한다. '시녀들' 속 인물들의 시선을 쫓다 보면 끝없이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정작 이 작품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작품 속의 '시적 화자'가 누구인지 계속 묻게 된다. 이 수수께끼의 방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펠리페 4세를 '딸 바보'로 만든 귀여운 마르가리타 공주는 두 번째 왕비에게 얻은 늦둥이다. 강렬한 명도, 채도의 시각적 효과로 우리의 첫 시선은 어린 공주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예쁜 어린 공주님을 가장 먼저 돋보이게 하는 것, 이것이 화가 벨라스케스가 설정한 첫 번째 의도일지도 모른다. 어린 공주에서 시작한 시선은 이내 다른 인물들에게 이동하게 된다. 공주는 누구를 바라보고 있을까? 여기 이 방에 서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 그림 속에 등장한 화가 벨라스케스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미술사학자 벨지는 펠리페 4세가 기분 전환 겸 왕비와 공주를 데리고 벨라스케스의 작업 현장을 구경하곤 했다면서 '시녀들'은 이러한 비공식적인 모임의 스냅 사진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연구자 유스티는 국왕 부부가 모델이 되는 작업현장에 공주가 찾아온 것으로 보았고, 미술사학자 브라운은 공주가 벨라스케스의 작업을 구경하러 왔고, 이후에 왕과 왕비가 도착하여 어린 시종 호세가 왕과 왕비의 진입로를 터 주기 위해서 개를 발로 차서 깨우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화가가 국왕 부부를 그리던 작업 중에 어린 공주의 침입을 받은 상황이라면, 화가는 어서 이 야단법석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멀찍이 캔버스에서 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엄마 아빠에게 달려가고 싶어 하는 마르가리타 공주 옆에서 시녀들이 이것저것으로 그녀를 달래는 중이며, 수녀 복장의 시녀장은 공주를 작업실로 데리고 온 호위병에게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야단치는 중일 수도 있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의 궁정 화가로서 주로 펠리페 왕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당시 스페인의 펠리페 왕가는 혈통을 지키기 위한 근친혼으로 부정교합이 심한 주걱턱과 정신질환을 앓았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모든 펠리페 왕가(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 혈통) 초상화들은 상당히 미화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펠리페 4세의 막내아들이자 ‘미치광이 왕’으로 알려진 카를로스 2세는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의 최대 피해자로 유명하다. 카를로스 2세는 곱사등에 심각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고, 입을 다물어도 침이 흘러내리고, 성생활이 불가능하여 후사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들의 부족한 외모를 보완하기 위해 초상화에 왜소증 시종들을 자주 등장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일종의 '외모 몰아주기 효과'를 노린 셈이다. 벨라스케스가 유독 궁정의 왜소증 인물들을 많이 그렸던 것도 펠리페 왕가의 이러한 요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시녀들'에서도 어김없이 왜소증 시종들을 등장시켰고, 거기에 왕족들이 하등 계층으로 여겼던 검은 머리의 카스티야 출신 시녀들에 둘러싸인 예쁘장한 금발의 마르가리타 공주의 모습은 아마도 펠리페 4세의 자격지심을 만족시켰을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두 번째 의도는 신분에 대한 이야기다. 표면상으로는 그림의 의뢰자인 스페인 국왕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당시 신분 체계에 대한 화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근거들이 있다. 벨라스케스는 죽기 1년 전 스페인 궁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는데, 그 기사 작위를 나타내는 붉은 십자가 문양이 그림 속 자신의 옷 위에 새겨져 있다. 그의 작위 수여는 이 작품이 그려진 당시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벨라스케스가 기사 작위를 받은 후 직접 다시 그려 넣었다고 알려져 있다. 자화상이 담긴 이 작품 속 자신의 신분이 달라졌음을 분명히 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근거로는 공주 오른편에 있는 시녀의 시선이다. 무릎을 꿇고 공주를 보고 있는 왼편의 시녀와 달리, 이 시녀는 얼핏 어린 공주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자세를 취하지만 사실은 옆 눈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벨라스코 백작의 딸인 도냐 이사벨이다. 미술사학자 유스티는 그의 저서에서 도냐는 당시 스페인 궁정에서 소문난 미녀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모든 이의 주목을 받는 미녀였던 이사벨은 공주보다 자신이 돋보이기를 바랐던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분에 만족할 수 없는 이사벨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도 감상자들이 보아 주기를 원했을까?
왜소증이 있는 마리아-바르볼라의 시선은 공주의 시녀들과는 다르다. 그녀는 조용하고도 안정된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작품 속의 전체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 옆을 보거나, 개를 보고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호한 시선들을 제거해 보면, 바른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화가 벨라스케스와 마리아-바르볼라 둘 뿐이다. 만약 이들 앞에 대형 거울이 있었다면, 정면을 제대로 응시하며 서로의 시선이 만나는 이들은 바로 화가와 이 왜소증 시녀가 된다.
그런데 마리아-바르볼라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어떤 기시감이 든다. 그녀의 얼굴에 확연히 보이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적 신체 특징인 부정교합과 주걱턱에 시선이 머문다. 왕가의 유전자를 가진 여성일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적인 추측이다.) 화가 벨라스케스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닿은 종착점이 이 키 작은 여인에게 향한 것이라면, 화가가 작품 속 인물들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자세를, 심지어 우아하고 기품이 깃든 표정을 그려준 것 역시 기획된 의도라는 생각이 닿을 무렵, 우리는 어느새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시적 화자와 만나게 된다.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위와 같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는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한다. 작가는 '못생긴 추녀를 사랑한다'는 시적 자아의 고백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그는 마치 벨라스케스가 왜소증 시녀에게 보낸 특별한 시선으로 소설 속 여주인공을 서술한다. 소설 속 '그녀'는 못난 외모를 가진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지만 우아하게 드러낸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전 세계 여러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라헐 판 코에이는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라는 소설에서 '시녀들'에 등장하는 개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코에이는 개 분장을 하고 마르가리타 공주의 노리갯감으로 살아야 했던 바르톨로메라는 왜소증 시종을 시적 화자로 삼고 있다. 이 외에도 프라도 미술관 부관장이었던 페르도 페르난데스는 그림 속의 거울을 모티브로 하는 추리 소설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시적 화자들이 새로 태어났으니 이는 명작이 갖는 또 하나의 자질이다.
이 그림이 위대한 이유는 여러 시선이 만나고 충돌하는 화음과 파열음 사이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시적 화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 시선들을 쫓다 보면 결국 그림 속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벨라스케스의 방 뒤편 거울에 유령처럼 희미하게 비친 국왕 부부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당신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김춘수 시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고백처럼, 우리의 눈이 그림이 닿는 순간 수백 년 전 이미 죽고 없는 벨라스케스는 다시 유령처럼 존재한다. 왜냐하면 부활한 벨라스케스가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캔버스에 그리고 있으니까.
※이 글은 2012년 NICE 제30권 제6호에 게재한 내용을 재구성, 수정 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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