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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끌려간 사람들

입력
2022.11.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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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요코타 메구미

1977년 4월 중학교 입학 당시의 요코타 메구미. 그는 7개월 뒤 납북돼 생존 여부조차 불분명하다. 가족사진

1977년 4월 중학교 입학 당시의 요코타 메구미. 그는 7개월 뒤 납북돼 생존 여부조차 불분명하다. 가족사진

2002년 9월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사죄했다. 김 위원장이 밝힌 납북 일본인은 모두 13명. 북측은 생존자 5명을 두 달 뒤 일본으로 돌려보냈지만 나머지 8명은 모두 숨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4년 2차회담에서 밝힌 진상 조사 결과는 일관성도 신빙성도 없었고, 납치 문제는 지금도 북일 정상화의 걸림돌 중 하나로 꼽힌다. 일본 정부가 추정하는 납북 피해자는 최소 17명이다.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한 목적 역시 불분명하다.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공작원에게 교육시키는 데 활용하기 위해서, 의식화 세뇌교육을 시켜 공작원으로 부리기 위해서, 1970년 일본항공 JAL 351편을 납치해 북한으로 도피한 적군파(일명 요도호 사건)가 모종의 작전을 위해 일본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니가타현 니가타시 중학생 요코타 메구미(1964~ ?)는 1977년 11월 15일 하교 도중 실종됐다. 당시 13세로 피랍인 중 최연소자였고, 일본 경찰도 단순 실종으로 파악했다. 그가 피랍된 사실이 확인된 것도 정상회담에서였다. 북측은 그가 1986년 결혼해 이듬해 딸 김은경을 낳았지만, 산후우울증 등으로 여러 차례 병원을 오가다 1994년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2년 뒤 요코타의 유골을 반환했다. 일본 정부의 DNA 감정 결과 요코타의 유골이 아니었다.

귀순 공작원과 생환한 납북 피해자들의 요코타에 대한 증언과 주장은 엇갈렸다. 1994년 이후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 등 생존설도 있고, 숨진 것은 맞지만 진짜 사인은 향정신성 약물 과다 투여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일본 정부는 그 설들에 대해 ‘근거가 희박하다’는 입장만 반복할 뿐 진실은 여전히 묻혀 있다.

납북피해자 가족모임 등은 지금도 요코타의 납북 진상에 대한 북한과 일본 정부, 국제 사회 등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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