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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숨 쉬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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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의 비극은 의외성을 만나 폭발한다. 결말이 인과의 논리를 멀리 벗어날수록 비극은 더 비통해진다. 예를 들면,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 행동의 결과가 속수무책의 죽음일 때.
그 죽음이 비켜 가기를, 늙고 쇠약해져 자연사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빌어야 할 지경인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수학여행을 가다가, 생계를 위해 일을 하다가, 사랑한 뒤 이별을 하다가, 놀러 나가 길을 걷다가 죽음 당할 것을 걱정해야 하는 세계. 막을 수도 있었던 죽음을 막지 못하여 죽음 위로 억울하다는 수식어가 자꾸만 쌓여 가는 세계.
그런데 혹시 놓치고 있지 않은가. 숨을 쉬다가도 억울하게 죽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세계로 우리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후위기를 당장 막지 못하면 닥쳐올 세계가 바로 그곳이다. "우리는 기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가속 페달까지 밟고 있다"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말처럼 그 세계의 도착을 재촉하는 것은 우리다.
억울한 죽음을 양산하는 사회적 참사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우선 책임이 누적적이다. 부패와 과오가 시간에 따라 누적된 끝에 참사가 발생한다. "우리가 너무 미안해…" 참사 현장에서 참회하는 건 오늘의 참사를 막을 과거의 책임, 정치와 시스템을 쇄신할 집단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이다. 또한 참사의 피해는 불평등하다. 희생자들은 그들의 것이 아닌 잘못 때문에 다치고 죽는다. 인과응보의 법칙이 좀처럼 들어맞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기후재앙은 사회적 참사다. 인류가 시간을 들여 키운 인위적 재난이다. 오늘을 시작점으로 치면 앞으로 악화할 기후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다. 미래 세대에게 우리는 이미 너무 미안해해야 한다. 피해가 불평등한 것도 마찬가지여서 더 늦게 태어난 사람과 더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이상기후의 피해를 뒤집어쓴다. 심지어 완벽하게 무죄한 동물과 식물이 지금 이 순간에도 멸종하는 중이다.
사회적 참사의 비극에 치를 떠는 우리는 기후위기엔 이상스럽게 둔감하다. 기후 공약도, 기후 보도도 대체로 인기가 없다. 기후참사의 희생자 혹은 유족이 될 것을 심각하게 걱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후 관련 최고위급 국제회의인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27)는 이집트에서 차가운 무관심 속에 열리고 있다. 지난해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10위를 찍은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의 총회 불참은 별로 비판받지 않는다. 기후재앙은 무관심의 재앙이다.
기후재앙은 그러나 어떤 사회적 참사보다 파괴적이다. 자연사를 향한 가장 많은 사람의 소원, 가장 많은 생명체의 본능을 한꺼번에 박탈할 수 있는 것이 기후재난이다. 누구도 겪어 보지 않았기에 결말을 가늠할 수도 없다. 돌출하는 여느 사회적 참사와 달리 기후위기는 수십 년 전부터 예측돼 왔다. 알고도 막을 수 없다면, 그로 인한 죽음은 대량 학살이자 대량 자살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기후변화는 불가역적이지 않다는 것에 희망이 있다. 마침 우리에게 기후를 되돌려 놓을 힘이 조금 있다는 것에도 희망이 있다. 한국은 10년 뒤 온실가스 1인당 배출량 세계 1위가 될 수 있는 에너지 과소비국이다. 개발도상국, 저개발국에 사는 100명보다 한국인 1명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사회적 참사의 최근 사례에서 보듯 기후재앙이 닥칠 때에도 위정자들은 마음으로만 책임지며 폼 잡을 기회만 노릴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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